[에세이] 청빈은 내 벗

조회수 15601 추천수 0 2013.05.02 03:46:24

(청빈은 내 벗)

 

  강 배3-1.JPG

 

부운의 벗은 학, 학의 벗은 바람, 고비 고갯길을 마-악 넘어가는 겨울도 세 벗의 멈칫거림이 안타까운지 동작을 차마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우왕좌왕하는 그의 흐트러진 걸음을 보면 안다. 누구 하나도 제외하지 못하는 바로 동장군 그의 공동의 벗이기에 그러하리라.

 

어제 처음 아껴뒀던 구휼미 보리쌀을 풀었다. 꽁꽁 얼어붙은 산하에 초록의 동나물 마저 검고 납작하도록 쇠해졌기 때문이다. 눈보다 무서운 된서리의 냉엄한 서릿발에 손을 든 까닭이며 지금쯤이면 풀 때가 됐다. 원래는 눈이 깊은 계절에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 구휼용 겨울식량이지만, 땅이 길게 바짝 얼어있을 경우에도 분명히 유효한 먹거리가 된다. 뜨락 한 구석 언 눈 위에 풀어놓은 몇 줌의 통보리는 밤에 찾아오는 작은 산짐승들을 생각했고, 동산에 풀어놓은 몇 줌의 보리쌀일랑 아무렴 산새들을 위했음이나 입장이 바뀌어도 얼마든지 나는 좋겠다.

 

나도 먹지 않고 일껏 아끼며 감춰뒀던 양미리 한 두름은 얼마 전 감쪽같이 도둑을 맞고야 말았다. 내 덕에 몇 가족으로 식구 수를 불린 잡식성 너구리들, 넉살좋은 녀석들을 생각해 매년 겨울이면 이층 테라스를 오르는 나무계단 아래, 누구든 손 타기 어려울 만한 곳에 걸어두고 있던 한 두름을 올핸 기어코 몽땅 잃어버린 것이다. 그동안 많이도 약이 올랐던 모양인지 수년 동안 반복된 학습과 집요한 노력을 바탕으로 기어코 곡예에 가까운 동작을 수행,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가져가 버렸다. 어느 녀석인지 난 안다. 알아도 아주 잘 안다.

이즈음 난 한 가지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산중에 사는 생명들 치고 누군들 아깝고 소중하지 않은 건 없겠으나, 작심으로 구하고 싶은 정감이 가는 녀석들이 있는가 하면, 스스로 구하기를 방치할 뿐 나서서 구해 주긴 싫은 치들도 분명히 있다.

귀한 짐승에 천한 생명도 있단 말인가? 내게 아무런 위해를 끼치지도 않을뿐더러 약간의 배려로서 크게 도움이 되는 멀리 사는 부류와, 너무 가까이 살기에 작지 않은 불편함을 안기는 부류의 가름은 있을지언정, 그것이 생명가치 자체를 놓고 따질 수 있을 정도의 결정적인 요건이 될 텐가의 자문엔 늘 그렇듯 정답이 없다.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하며 고민하는 시간만 매년 매번 허망하게 갖는다.

어차피 난 약간의 정과 이웃으로서의 도리를 다만 생각할 뿐, 일시 산에 의지해 사는 산사람이라면 몰라도 선승처럼 도를 닦는 깊고 어려운 입장은 아님을 떠올리며 쉬이 잊기로 했다. 복 불복의 단순함을 생각하며 쉬이 잊기로 했다. 아직은 보관창고에 감자가 넉넉히 남아있음을 떠올리면서 맘이나 편하게 잊기로 했다. 떠난 뒤에 후회와 회한이 될성부른 판단은 아예 피할 뿐 내리지 않기로 했다.

그뿐 아니다. 기왕에 먹은 맘 새날이 들고 산책로가 열리면 작은 양초 통에 뽀얗게 말라있는 작년 가을치 도토리 서른 개쯤도 해거리를 겪느라 텅 빈 고욤나무 아래에 풀어놓을 생각이다. 딱히 양이랄 것도 없음에 한 톨이라도 남겨두지 않고 다 풀어줄 생각이다.

평년엔 고욤나무 아래에서 다갈다갈 높이 달린 열매를 구하기 위해 뒷발로 서서 펄쩍펄쩍 뛰어오르던 노루 고라니의 잦고 된 발자국을 지금쯤 찾아볼 수 있겠으나, 올핸 빈 가지처럼 주변이 말끔할 뿐 노력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으니 안타까운 정황에 맘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다. 점프는 하지 않아도 이따금씩 찾아오는 녀석들의 헛걸음을 굳은 땅에서도 난 읽어낼 수 있는 덕분이다.

 

이젠 나도 밖으로 풀어줘야겠다고 생각을 정하게 된 확실한 동기가 있었으니 뜻하지 않은 택배 선물 때문이었다. 형님은 왜 아우의 맘 부담은 생각하지 않고 귀한 꽃게 장을 불쑥 보내 오셨을까? 특히 겨울철엔 먹거리를 극력 간략하게 가지는 내 습성을 미처 모르셨음일까? 받아서 반가움보다 심상의 부담이 앞섬을 난 구태여 감추지 않겠다.

어쨌든 이곳 산골짜기에서 누릴 수 있는 지금껏 가장 맛난 저녁식사를 한번은 먹을 수 있었다. 보기보다 짜지도 않았을 뿐더러 잘 익은 바다 꽃게 한 마리로서 얼마나 맛있는 식탁이었는지 모를 정도였고 즐거움은 그것으로 족했다. 그 이상 횟수가 길면 내 양심이 허락하질 않겠거니와 심보가 그럴지언정 먹은 게 순순히 살로 가고 에너지로 바뀔 리도 없다. 예전엔 지독하게 좋아했던 꽃게 장이었을지언정 미각에서 말하는 풍미의 전형, 밥을 추가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말리지 않았을 만큼 1회로서도 넘치도록 즐겼으니 더 이상 양심과 바꾸고 싶진 않다. 어차피 의도적인 소금기 섭취를 피한지도 오래 됐으니 밥도둑을 물린다 한들 할 말은 틀림없이 있다.

옳다! 써지는 문장이 더 혼탁해지기 전에 나머지는 예서 재를 두 개 넘는 오롯한 산중에서 통나무집 산촌카페를 경영하는 예쁜이들, 참 자연 속에서 묵묵히 순종으로 살아가는 그들 내외에게 안겨다 줌으로써 모두에게 이득 되는 방향으로 타협키로 했다. 그들이 맛있게, 맛나게 먹어줄 생각을 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적절한 대상이고 잘된 발상일 뿐, 맘 부담은 이로서 보람으로 바꿔지고 게딱지만큼 소박하고 작은 행복들은 그러기에 모두의 그릇을 모자람 없이 채우게 될 것이다.

모르시면 좋겠거니와 아신다 해도 형님은 부디 서운타 여기진 않으실 것을 굳게 믿는다. 이 정도에서 우직한 내 고집은 형님의 깊으신 배려와 훌륭한 타협을 얻을 것이며, 청빈이야말로 내 자랑스러운 벗으로 길이 곁에 남을 것이다. 청빈도 모으면 얼마든지 부자 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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