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모퉁이에서 차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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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날 만에 보여지는 달님이 하필 보름달이었다. 이제 막 서편 등성이로 넘어가려다 내게 들킨 달님의 어깨가 솔가지에 걸려 잠시 덜커덕거리고 있었다. 산 위로 향할수록 짙어지는 밤안개도 워낙 둥그런 달님의 광채를 차마 다 가리진 못한다. 포장이란 수단이 이래서 감춰진 상자 속의 표상을 무조건 신비롭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단 말은 맞는 말다. 누르스름한 금빛 광채들이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희미한 내 그림잔 뒤로 누운 키도 저만치, 그의 흔들리는 손에 차 한 잔의 흔적이 보일 듯 말 듯.

 

한낮엔 햇살이 비침을 틈타 며칠씩 젖은 채 마르지 못했던 빨래를 재빨리 말리는데 성공했다. 계절의 축복이라면 긴 장마철도 막바지라 옷가지에 물 냄새가 조금씩 배어있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집을 짓다가 남긴 각목들을 지붕 테라스에 기대어 세워 놔 만들어진 나무 그늘 속에서 다갈색 산토끼 한 마리가 종일토록 쉬다 갔다. 바깥의 태양 빛이 워낙 밝았던 탓으로 어두운 방안에서 지켜보는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제 놈은 절대 위험 방향인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고 안심하는 진 몰라도 내가 바로 곁에서 녀석의 얼굴이며 수염 하나까지 세세히 관찰하고 있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을, 혼자 마른세수도 하고 꼬박꼬박 졸기도 하는 동안 나도 숨깨나 참느라고 애를 쓰긴 했다. 겨울이면 눈같이 하얀 토끼가 지금 철엔 짙은 다갈색 보호색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야행성이 강한 산토끼를 밝은 대낮에 바로 코앞에서 지켜볼 수 있는 기회도 흔한 일은 아님이다.

 

몸집을 제법 부풀린 어린 들꿩과 당년치 산비둘기들도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 계절의 부산함에 쏠려 난 존재조차 무시당하기 일쑤다. 담벼락 가까이나 층층나무가지에 앉아 있다가 우렁찬 날개 짓으로 하늘을 솟구치는 소리에 정신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경우도 잦다. 그럼 난 한소리 내지른다. “어이쿠! 망할 녀석들” 긴 궂은 날씨 탓에 섭생이 오랫동안 넉넉지 못했을 것이고, 허기에 지친 뒤끝이라 경계심도 많이 느슨해진 모양이다.

산토끼도, 들꿩도, 산비둘기도 평상시엔 목소릴 듣기가 쉽지 않은 조용한 녀석들인데 오늘은 제법 시끄러울 정도로 말수가 늘었다. 화려하진 않아도 귀염성 있는 외모들에 비해 오랫동안 써먹지 않은 탓인지 녀석들 목청이 도저히 칭찬해 줄 수 없을 만큼 탁한 건 사실이고 유감이다. 하긴 순박한데다 목소리까지 아름다웠더라면 야생으로 고스란히 남겨둘 우리네 인간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몽땅 모셔다가 애완동물이란 명분으로 곱다시 가축화 해버렸을 테지, 아닌 게 아니라 들꿩은 야성을 온전히 제거하기가 쉽지 않아 아직껏 가축화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으나, 토끼와 비둘기 종류의 일부는 이미 오래 전에 가축화가 돼있기는 하다. 쉿!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토끼와 비둘기는 그저 순박하기 때문에 가축화에 성공을 했지만, 들꿩은 순박함에 앞서 무지 멍청하기 때문에 가축화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은밀한 사실을 난 알고 있다. 이러한 들꿩 녀석의 노골적인 멍청함을 변명해 주기 위해 그냥 ‘야성이 강해서’ 라고 곱게 덮어줄 따름이다.

하여간 토끼이던 비둘기이던 적당한 선에서 제 녀석들이 먼저 날 피해 주기에 크게 신경을 쓸 일이 없으나, 들꿩 녀석만큼은 오히려 내 쪽에서 슬슬 피해 다녀야 하는 난처함은 있다. 추운 겨울이 닥치기 전에 마른 풀 씨앗이나마 한 입이라도 더 먹어서 살아갈 기운을 저축하겠다는 대야 말릴 재간은 없겠고, 그마저 말린대서야 난 올바른 이웃도 아니지 않겠는가.

외출할 때와 산책할 땐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안에서 컴퓨터와 씨름을 할 때, 글줄이나 읽고자 할 때 등 하여튼 의식할 수 없는 불시에 의외의 참견과 충격을 안겨주기 일쑤다. 그저 놀래키는 정도가 아니라 때론 내 행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 계절부터 첫눈이 내리기 직전까진 난 들꿩 녀석 때문에 이따금씩 경악과 실소를 번갈아 터뜨려야 하는 사태를 일상 속에서 각오해야한다.

이웃 중에 다소 멍청한 이웃이 하나쯤 곁에 가까이 산다지만 그의 근본이 순수성임을 알기에 복일지언정 해가 될 순 없는 일, 그로부터 천진함의 근간을 배우고 심상의 여유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처럼 깊고 청아한 글 한 줄의 여지도 더불어 얻을 수만 있다면 그건 정말 좋겠다.

 

덧붙이고 첨가해서 다양한 창작 문화를 만들어 내는 일도 가치가 적은 일은 아니겠으나, 지나치게 덧씌워진 나머지 원형과 본질이 보이지 않을 땐 애써 다시 지우고 거둬내 원형의 참모습을 밝히는 일 또한 소홀히 할 수 없는 일, 훨씬 많은 이들이 창작과 생산을 능사로 여길 때 일부의 소수는 ‘아니요’ 랄 수 있는 원형질 추구의 고집스런 모습도 기필코 필요한 것, 내게 놓인 현실에서 어느 쪽을 추종할 것인가는 이처럼 이미 결정돼있다. 멍청하나 고귀한 생명체, 내 이웃 들꿩들의 의지처럼 바로 후자에 있을 것이나,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까진 차마 하지 못하겠다.

답답한 내가 주인공입네 하는 즉시 곁에 남아있을 녀석들 하나 없을 것이고 이웃 하나 없는 빈 마을에서 혼자 통 반장 다 해먹어야 무슨 의미가 있을 텐가, 따라서 이곳 골짜기에서의 삶은 내가 주인공일 수 없음이다.

만물의 영장이란 명분 아래 난 표 나게 그들의 궁한기 한철을 돕는 척 한다지만, 알고 보니 그들은 조금의 표도 안 나게 사철이 궁한기인 날 감쪽같이 보살펴주고 있었던 게다. 모두가 제 위치에서 제 분수를 지키며 살아가는 걸 바라볼 때 스스로 작아지는 모습을 감출 수 없음에 단지 그들에게 모나지 않은 이웃으로 겨우 인정받고 있단 것만으로도 난 감사할 따름이다. 혼자 스스로 잘나서 험한 오지에서도 굳세게 살아가고 있는 줄 알았더니 아차! 이웃들의 배려와 깊은 양해가 우선이었단 걸 자각한지도 기실 얼마 되지 않는다.

초기엔 사납게 긴장을 풀지 않던 돌무더기 뒤 뜨락 맹독 살무사도 이젠 날 본체만체 느직하게 제 갈 길로 가는 걸 보면, 그들 세계에서 나 또한 일원이 돼가고 있음을 눈물겹게 사 알겠더라.

내 자발적 행동능력은 놔두면 생산력보다 파괴력이 우선하기에 개별적 가치와 보편적 가치의 길모퉁이에 서서 채 비우지 못한 차 한 잔을 그저 들고만 서있다. 자주 떠오르는 막연함 때문이다.

그래, 이곳에 머물러 있을 동안만큼은 주어진 현실 여건에 맞춰 들꿩의 순수 멍청한 길, 산비둘기의 천성적 순수 소심한 길을 따라갈 것이다. 아무리 살피고 또 살펴도 멍청한 길과 순수한 길 사이에 어떤 차이도 나는 발견할 수가 없다. 근원은 천진스런 한곳이기 때문인가, 멍청함도 전염되기 때문인가, 차는 다 식었고, 달님은 이울었고, 깨우침의 길은 멀어도 한참 멀었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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