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방랑예찬

조회수 8983 추천수 0 2012.06.30 18:56:02

(방랑예찬)

 

부운(浮雲), 이 단어를 난 참 좋아한다. 운명이야 수명이야 내 소관이 아니겠지만 당장에 막힘없이 이승을 떠다니는 구름이 어찌 자유롭고 부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몸도 몸이지만 의지와 사유의 자유로움을 진정으로 소망한다. 소망하되 욕심내진 않는다. 꺾이면 실망하고 몸은 내 몸이 아닐 때도 있으니까.

 

풍운지교(風雲之交)라 하듯 부운에겐 바람이 유일한 벗이다. 있는 듯 없는 듯 떠다니면서 멀리 떼어둘 뿐 그림자조차 소유하지 않는 부운은 하늘아래 가지 못하는 곳도 없다. 말이 없어도 발이 없어도 하나의 뜻으로 연결되는 부운은 바람만이 천상에서 유일한 동반자다.

형체를 온전히 바람에게 내맡기는 부운의 덕은 하늘만큼이나 높다. 아무리 높은 곳에 고고하게 있어도 고향이 대지란 걸 결코 잊지 않는다. 제 몫을 다하고 높이 오른 부운의 방랑은 그래서 헛된 게 아니다. 완전한 휴식을 취하기 위한 호젓한 방법이고 난 거기서 그의 지난 꿈을 찾는다. 아래 세상을 향한 그리움도 읽는다.

 

미지의 곳에서 얻어지는 생소한 자극도 난 좋아한다. 살아있단 존재 확인이 마냥 고맙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숨 가쁘게 밀리던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순간 의식은 더욱 팽팽해지고 보이는 모두가 한 장 화폭이 되어 심상의 캔버스 안으로 들어온다. 늘 보던 정경도 생소하게 느껴지는 정결한 시간이다.

방랑엔 단지 시간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의지 하나 뿐 다른 목적이 있지 않아야 옳다. 잠시라도 시간예속과 절차의 구속에서 탈피하고자 애쓰는 안간힘이기에 전횡이 바쁠수록 따르는 느낌도 크다.

 

99리 해안의 장쾌한 파도머리는 아닌 게 아니라 태평양의 본모습이었다. 연 사흘 거의 밤샘작업을 끝낸 후 휴식보다 급한 건 동경탈출이었다.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욕심에 몸 축나는지 모르고 달려들던 푸른 시절에도 탈출 욕구는 늘 가슴에 화두처럼 담겨있었나 보다.

내 나라도 아닌 이역의 한 구석 교통지도 달랑 한 장만 들고 무작정 떠난 곳이 미사키구치였고 이치노미야였다. 도시 전철로 갈 수 있는 가능한 한 멀고 호젓한 바닷가를 선택한 것일 뿐, 미리 알고 선택한 건 물론 아니었다.

지바현, 이치노미야 99리 해안의 완만하고 단조로운 해안선보다 태평양 검푸른 물과 흰머리의 파도를 거느리고 있는 부운의 모습은 가히 충격이었다. 멀리 중간에 하와이가 있을 뿐 아무것도 거칠 것 없는 본판의 광대함을 앞에 놓고 쿵쾅거리는 심장이 터지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부운의 벗 바람도 대양의 위세에 걸맞게 내달리는 소리 역시 우렁찼었다. 그렇듯 검은 모래에 흰 파도 드센 바람에 부운 한 무리 젊은 날의 파릇한 가슴을 맘껏 차고 나가는 방랑여행의 충격을 난 지금껏 잊지 못한다.

 

감동은 목적지에 닿아서만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여름날의 열기를 이겨내며 어디건 가고 오는 과정 속에서 절반은 이미 얻어진다. 나머지 절반은 서서히 오는 게 아니라 벽력같이 들이닥치기 일쑤다.

방랑여행이 특히 젊은이들에게 권장되는 이유는 밖으로는 세상 폭넓음과 색채 다양함을 직접 체험하고, 안으로는 바로 이렇듯 돈오와 점수를 기대하는 불퇴전의 화두가 작게나마 간접 체험되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며칠 밤을 샌 피로감조차 침범할 수 없는 감정의 회오리 속에서 한참씩 떨고 있던 부운의 그리운 내 젊은 시절, 배움의 의지는 하늘을 찌르고 욕구는 끝 간 데 없을 만큼 선뜻하게 날이 서있는 와중에도 보이지도 않는 자신의 한구석을 왜 그리 꼭 붙들고 놓치지 않으려 기를 썼는지 모를 일이었다. 강박증이랄까 옥조임이랄까, 시속의 빼곡한 일상을 탈피, 탈출하려는 외엔 다른 목적은 없는 완벽한 나그네, 그게 당시 일시적이고 충동적인 내 모습이었다.

 

누군가 방랑보다 뒤끝의 허전함이 견디기 더 힘들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난 지금도 가끔씩 꿈속에서 태평양의 파도머리에 휩쓸려 다니다가 부운에 걸려 퍼뜩 잠에서 깨어난다. 한번 깨어나면 그 밤은 다시 잠들지 못한다.

 

긴 겨울 끝에 동산 넘어 훈풍이 불어올 땐 겨드랑이가 간지럽다. 이상의 고귀한 날개는 아닐지라도 떠나야한다는 재촉이 만만치 않다. 바깥만 바라봐도 맘이 먼저 걸음을 옮긴다. 몸보다 두어 걸음 빠른 맘은 이미 물가를 서성이고 있다.

 

봄 방랑은 걸음보다 맘이 먼저 바쁘다. 몸과 맘이 제각기 따로 놀 때 그 사이를 채우고 드는 게 바람이다. 공허다. 바람은 당연히 봄바람이고 봄바람에 아주 취하면 쓸 약도 없다. 그저 어서 빨리 시간만 지나가 주길 바랄 뿐이고, 맘대로 되지 않음을 빌미 삼아 기어코 도망치듯 방랑은 순식간에 떠나지고 만다. 속박된 시간이 바람처럼 떠나주지 않으면 맘이라도 구름처럼 떠나야하는 게 아웃사이더 부운의 필연이자 숙명이다.

 

등 떠미는 건 바람이고 떠밀리는 건 부운이다. 바람에 밀린 부운을 사람들은 나그네라 한다. 봄 나그네는 충동으로 움직일 뿐 계획이 앞서지 않는다. 열린 책장조차 닫을 여유가 없는데 의지를 생각을 앞세울 틈이 있을 리 없다.

 

혹독한 계절은 겨울이 아니다. 모든 것들이 쇠락의 길을 향해 걷는 때, 바로 가을이다. 가을이야말로 진정한 방랑의 계절이다. 화려하고 흥청거렸던 지난 계절들의 흔적이 다가올 침잠의 계절에 앞서 여운도 길다. 여운은 미련이 되고 5월보다 잔인하다.

봄은 기대가 앞서지만 가을은 서글픔이 앞선다. 봄처럼 어지럽거나 충동적이지도 않고 엄청 화려한 듯해도 꽃이 드문 계절이 가을이다. 봄처럼 밖에서 부르기에 스스로 달려 나가는 게 아니라 바람에 등 떠밀려 하는 수 없이 뛰쳐나간다. 내부엔 무거운 가슴앓이가 부엉이처럼 웅크리고 있는 줄 알기에 바깥으로 달아나 보지만, 거긴 조락의 둔중한 파편들이 독수리처럼 떼로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어디나 통증이 숨어있는 줄 알면서도 뒤가 하필 겨울이라니 피해 갈 방법은 없다.

 

하늘이 높고 멀어 다행이었지 가깝고 다정한 곳에 있었다면 인류의 절반은 거기에 투신했을 것이란다. 아득한 심연으로 끌어당기는 임장현상은 얼마든 그러고도 남았을 터, 추수하고 거둬들이는 숨 가쁜 과정이라도 없었다면 시를 좋아하는 인구의 절반은 이시기에 자살을 하고 말았을 게다. 타작마저 끝낸 뒤 곳간의 포만감보다 남겨진 빈 들판의 허전함을 견디기 힘들어하기 때문이고, 다가올 찬 겨울이 두려운 게 아니라 우선 시린 가슴의 공백이 날씨보다 더 어둡기 때문이다. 그래, 분위기가 사람 잡는 계절이 바로 가을이다.

방랑을 떠나지 않으면 앉아서 당하기 마련이고 달아나도 소용없단 걸 매년 아플 만큼 아픈 뒤에야 깨닫는다. 횟수 거듭되어도 도무지 인이 배기지 않는다.

 

방랑은 현상을 도피하려는 자전적 의미가 깊으나 방황은 현실에서 밀려난 듯 자괴적이고 애처롭다. 그래, 방랑은 고즈넉함이 아득하고 방황은 허전함이 가득하다. 방랑이 야한 들길을 찾는다면 방황은 포장된 도시의 이면을 헤맨다. 들길엔 시인이 아득하고 도시엔 바보가 가득하다. 그러기에 방랑은 고독한 시인이 할 일이고 방황은 안타까운 바보나 할 짓이다.

산 속에 있을 땐 바다를 그리워하고 물에 있을 땐 뭍을 그리워하는 난 타고난 방랑자, 바보시인이다. 아무려나 갈수도 없고 노래도 못하는 바보시인이 되어 종착지 없는 맴을 돌고 또 돌아야 한단다.

 

나그네 방랑길은 언제나 비밀스럽다. 하지만 아무리 은밀한 듯 비밀로 감추려 해도 난 돌아서는 그의 빈 등을 보면 한눈에 척 안다. 다만 알아도 모른 척 해줄 뿐이다.

 

* 졸저 자연수상록 <한스푼>에서 전제 *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sort
659 교보 환경상 수상자 특별강연 조홍섭 2012-04-18 8824
658 '차기 국회에 바라는 4대강 사업의 처리 방향' 세미나 imagefile 조홍섭 2012-01-27 8828
657 4대강 현장조사 기금 마련을 위한 콘서트 imagefile 조홍섭 2012-02-06 8835
656 어린이 생물자원학교 겨울방학 프로그램 조홍섭 2013-12-05 8865
655 뜨거운 프로젝트의 미래 imagefile 조홍섭 2013-10-04 8869
654 하천 및 수자원정책 진단 및 대안 모색 토론회 조홍섭 2012-09-03 8871
653 [에세이] 갈 저녁 한 때 imagefile 고충녕 2013-10-01 8881
652 사용후 핵연료 공론화 토론회 imagefile 조홍섭 2013-03-04 8885
651 오대산 국립공원 ‘6번 국도의 저주’ image jjang84 2012-07-03 8901
650 농장동물 관련 동물보호법의 개정 방안에 대한 토론회 조홍섭 2012-11-27 8910
649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 10년을 말하다' 심포지엄 image 조홍섭 2013-11-25 8916
648 자생식물 열매전시회 조홍섭 2013-12-16 8923
647 [환경재단 정기상영회] 1월 11일, 지구를 지키는 가장 뜨거운 방법! imagefile 조홍섭 2012-01-05 8931
646 [에세이] 산골짜기엔 춘정 imagefile 고충녕 2013-05-15 8949
645 식물학자 되어 보기 프로그램 조홍섭 2012-08-13 8965
644 [에세이] 서편에 지는 달님 imagefile 고충녕 2013-04-17 8971
643 숲 해설가 양성과정 모집 imagefile 조홍섭 2012-04-09 8974
642 2011 강화 갯벌 심포지엄 image 조홍섭 2011-11-28 8977
» [수필] 방랑예찬 고충녕 2012-06-30 8983
640 [에세이] 선배 그러면 안 돼 1-3 고충녕 2012-10-18 8984

최근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