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도 기적과 함께)

 

이틀을 버텨주던 제법 내린 눈은 녹다가 마르다 다시 찾아온 추위에 나머지는 어는 바람에 대지바탕을 묘하게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사람이 다니는 도로야 무수한 발걸음과 자동차바퀴들로 성가신 덕분에 많이 지워져 얼마든지 안전했지만, 자연이 임자인 도시 변두리도 이면 한적한 곳은 다니기가 쉽지 않습니다. 스스로 눌리고 다져진 눈은 눈이라기 보단 반쯤은 얼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계절이 아니면 도무지 누릴 수 없는 별단의 행사려니 난 조심조차도 즐겨합니다.

 

축복도.jpg

 

더해서 며칠이고 추위가 이어질 것이라니 혹한 끝에야 만나질 한 가지 간곡한 기다림이 있는 누구는 소망마저 안고 겨울 들녘을 즐거이 달리기 마련입니다. 모쪼록 이 계절을 맘껏 누리고 즐겨서 심신에 흠씬 각인시킨 다음 이후 한 여름날 염천 속에서 한 소절씩 오붓하게 뽑아 먹을 작정입니다. 신식 에어컨 저리가랄 정도로 고성능인 줄 모르지 않습니다.

 

아침 해 뜰 무렵에 강둑에서 물오리 몇 장을 담아내고 이후 한 두 차례 순행은 그저 건성일 뿐 사진기의 전원스위치도 넣지 못했습니다. 새삼스럽지도 않으니 아쉬움도 있을 리 없지만 오후나절에 혹시나 석양이라도 한 커트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하루의 마지막 여망을 들고 마을 서편 벌판 향 가볍게 스쿠터를 몰았습니다.

 

맑을 뿐 제 시간이 되어도 하늘엔 구름이 거의 보이지 않았으니 태양인들 물감을 뿌려 줄 석양팔레트가 되어 질 리 없습니다. 하지만 그냥 돌아서려다 문득 다시 돌아본 바른편 먼 산 능선에 의외의 숨은 선물이 빙긋이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른 무지개였습니다. 겨울철이 아니면 쉽게 만나지지 않는 참으로 진귀한 마른하늘에 서는 무지개 말입니다.

 

축복도1.jpg

 

비와 함께 만들어지는 무지개는 태양의 반대편에 순광으로 서주기 마련이지만, 지금 이 마른무지개는 구름 속에서나 잠시 발생할 뿐만 아니라 아주 드물게는 해와 같은 방향에서 역광으로 서주기도 한다니 그야말로 행운도 큰 배려에다가 겨울의 요정, 내 친구 동장군의 막급한 은혜가 아니라면 만남을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지 않은 기적이랄 수 있음입니다.

미진하기로 땅에까지 내려오진 못하겠지만 지금 보일 듯 말 듯 작고 희미한 구름 속을 열심히 오르내리며 눈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확고한 징표입니다. 맑고 잔잔한 감동이 물밀 듯 전신을 온통 휘몰고 돌아다녔습니다.

무색무념 속에서 최면에 걸린 듯 난 셔터를 눌렀고 태양이 완전히 휴식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한 30여 분 동안 태양신과 님프 동장군과 눈의 요정이 누리는 기막힌 데이트에 나도 함께 참여할 수가 있었습니다.

태양도 꼴깍 넘어가고 무지개도 따라서 지워지고 만족한 심정으로 렌즈 뚜껑을 닫으며 난 잠시 코끝이 찡해 오더이다. 우정이란 단지 마음일 뿐 실로 잘해 준 게 하나도 없는데 이 무슨 넘치는 배려이고 은혜인가 모르겠기 때문이었습니다.

 

맞바람에 단상이 심히 흔들린다면 혹여 이 저녁나절에 누린 감흥이 한 톨이라도 감해지랴 속도랄 것도 없는 느린 박자로 집에 돌아왔지만 아니었습니다. 내 친구 동장군 님프의 축복은 서편 겨울 들녘 거기서 끝마쳐진 게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모니터 화면에 그간의 요소를 올려놓고 적당히 마무리 정돈작업을 하는 동안 한 장 사진 속에서 불연 듯 오른 편 위쪽 하늘바탕에 찍힌 티끌을 발견한 것입니다. 담아온 모든 장면들을 점 하나까지 세심하게 관찰 확인하는 일은 찍는 일 못지않게 기쁨으로 수행하는 사진인의 나머지 임무랄 수 있습니다.

 

축복도2.jpg

무지개 오른편 높은 하늘에 검정색 의문점 하나, 습관처럼 모니터 화면을 먼저 손톱으로 긁어봤지만 세속적 티끌 먼지 속진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결국 종종 뛰어드는 우주의 불청객일 것이라 생각하며 헛일 삼아 자꾸 크기를 키워나갔습니다. 그러나 한 단계씩 장면이 늘어날 때마다 내 심장은 막을 수 없이 혼자 크게 널뛰기 시작했습니다.

넉넉히 확대되었다고 생각한 즈음 난 기어코 눈물 한줄기 왈칵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누구에게 있어 낙루란 심장 뛰기처럼 말릴 틈도 재간도 있을 리 없는 불수의(不隨意) 작용이었습니다.

 

축복도3.jpg

 

축복도 기적과 함께 올 수 있답니까? 거긴 꿈에라도 잊을 리 없는 친구, 먼 그림자만 봐도 틀릴 리 없는 벗, 단 한 마리일지언정 어김없는 계절의 진객, 남녘을 향해 높이 나는 학, 두루미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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