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황금색 달

조회수 9415 추천수 0 2013.11.25 18:47:59

(황금색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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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벼 모가지가 요 며칠 사이에 눈에 띄게 부풀어 올라 밑으로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오늘 낮 지루한 장마도 완전히 끝이 났단 예보를 신호탄 삼아 이 서방이 무논에 목도열병 농약을 동작도 빠르게 살포하고야 말았다. 혹시나, 행여나 하며 반딧불이의 재 활동을 은밀하게 고대하던 맘이 완전히 돌아서는 계기는 이처럼 확연하게 금지선이 그어지고 말았으니, 올 여름밤 다시는 대창 밖으로 반딧불이의 출현을 기대하진 못하도록 상황이 명백해진 것이다.

  제 본분에 충실한 이 서방의 수고를 결코 탓하진 않는다. 당연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평이한 농군의 일상이 내겐 가슴 한구석을 메마르게 하는 행위가 될지언정 그것도 형설지공의 명문을 신용하는 글쟁이 팔자이려니 라고 수긍할 도리밖에 없다.

  난 형설지공(螢雪之功)을 신봉함이 분명해도 이 서방은 주경야독(晝耕夜讀)의 미덕을 행하진 않을 것이다. 야독엔 형광이 지극한 상식이고 형광의 반딧불이에게 농약 제초제는 절대로 비상식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대판 농군과 재래종 글쟁이의 여름철 궁합은 어쩔 수 없이 조금씩 어긋나 있는 것 같다. 시절에 따라 인심도 변한단 사실이 증명되는 한 가지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속으로 혼자 서운해 할지언정 매정함도 정에 속하는지 이 서방을 무작정 미워할 수가 없다. 속이라도 시원하게 욕이라도 한바탕 해주면 좋겠지만 욕도 하지 못하는 매정함이 무정함만 차라리 같지 못한 것이다.

 

  참고 기다리다 못해 간만에 도로변 계곡을 따라 오밤중 산책을 헛일 삼아 나가야 했다. 벌써 절반쯤 상한 가슴이 더는 미루지 말라고 앙탈을 한다. 올해는 이미 사라진 것으로 치부해 버린 반딧불이가 못 견디게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동남쪽 하늘에 막 떠오르기 시작한 보름달이 황금색으로 휘황하다. 외롭지도 않은지 이지러진 흔적 하나 없이 말끔한 달님의 주변엔 달무리의 호위도 전혀 없다. 워낙 명징한 달빛 덕분에 주변에 무수한 별빛도 다소곳이 사그러들어 자리를 양보하고 있다. 눈으로 보긴 티끌 하나 없이 말끔한 밤하늘이지만 아주 높은 곳엔 안개가 살짝 덮여 있는지 따듯한 황금색이 지천에 가득한 달밤이다.

  (하필 견디지 못할 만큼 간절한 오늘이 보름밤이라니) 밤이 낮처럼 밝으면 반딧불이가 움직임을 사린단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매섭던 한낮 열기도 제 풀을 꺾였는지 풀잎마다 흥건한 이슬에 샌들이 금세 젖는다. 골골이 계곡을 따라 어둠은 깊어도 포장도로는 훤하게 빛이 난다. 이른 봄에 새로 그은 백색 구획선이 산뜻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저 쏘다니기엔 랜턴이 전혀 필요치 않을 정도지만 이것도 꼭 필요할 때가 있어 공연함을 무릅쓰고 들고 나서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는 일이 생긴다.

  문득 이제까지 잊고 있었단 듯 심장 언저리 근육이 잘게 파르르 떤다. 걸음을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며 경련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약이 떨어진지도 제법 되는데도 아직 구비를 하지 못하고 있음이 생각난다. 이번 장보러 읍내에 나갈 때 서점에 들르는 길에 약방에도 꼭 들러야겠다.

  잘게 들이쉬는 숨길에 아직 식지 않은 한낮의 더운 열기가 아스팔트에서 확 풍겨 온다. 아스팔트 냄새보다 풀 냄새가 더 강해서 다행이다.

  얼핏 내려다보는 눈길에 뭔가 검은 흔적이 보인다. 이때 필요한 게 바로 랜턴이다. 환한 랜턴 불빛 아래 비치는 건 아주 커다란 새의 날개 깃털이다. 억세고 강건한 깃털을 주워 찬찬히 살펴보니 완전히 성장한 수리부엉이 주 날개 깃털이 틀림없다. 표범 무늬 얼룩이 짙고 선명하다. 다른 부위 깃털이라면 몰라도 주 날개깃은 여간해서 저절로 빠지는 법이 없는데 웬일인가 모르겠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옳거니! 전화선 전봇대와 통신선이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다. 억울한 부엉이가 모르고 전선에 몸을 스친 결과로 깃을 떨어뜨린 게 분명해 보였다. 충돌의 상처가 얼마나 심했는진 모르겠으나 더 이상의 흔적과 증거는 없는 것으로 봐 차마 비극적인 상황에까지 이르진 않은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자연의 나뭇가지와 바위들은 얼마든지 잘도 피해 가는 부엉이, 올빼미가 유독 인공의 전선은 눈에 보이질 않는지 가끔씩 사고를 낸다. 꺾이거나 흐트러지지 않은 말짱한 깃을 코에 가까이 대니 야생 조류의 독특한 채취가 아직 짙게 남아 있다. 공중 충돌 사고가 난지 얼마 되지 않는단 증거다. 수리부엉이에겐 고통을 동반한 망실된 옷자락이겠지만 내겐 오늘밤의 훈장이고 보람이다. 잘 연구하면 포인트 메모용 고전적인 깃털 잉크 펜이라도 만들어질 수 있는 참한 보물이 되겠다.

  문득 주 날개 끝 깃털과 포인트 메모용 팬의 의미상 궁합은 나무랄 데가 없이 잘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밤 시간을 뜬눈으로 지키는 부엉이의 굳건한 의지처럼 어둠이 아무리 눈을 가려도 의식은 놓치지 말고 살아 움직이란 부추김일지언정 누구와 누구 간에 엇 궁합과 같진 않은 것이다.

 

  양쪽 날개 끝에 쫙 펼친 손가락처럼 달려 있는 10여장의 깃은 직접적인 상승 부력을 제공해 주진 않는다. 단지 몸체가 목표를 향해 곧장 다가드는데 유용한 직진성을 보장해 주고 날개 끝에 발생하는 와류 난기류를 제거함으로서 빠른 속도로 날아들 때 발생하는 공기 가르는 날카로운 소음을 없애 주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포인트 메모용 펜도 마찬가지, 의식이 해답을 얻지 못해 헤매다 퍼뜩 떠오르는 귀한 문맥을 냉정하게 잡아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고, 사고가 흔들리지 않도록 갈피를 바르게 정해주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생각하기에 따라 의미적으로 귀한 선물일 수도 있어 셔츠 윗 주머니에 길게 꼽아 두니 어깨 위로 튀어나올 정도로 길이가 길다.

 

  새의 깃과 털은 모양은 물론 용처까지 분명히 다르다. 깃은 나는데 직접 힘을 써야 하기 때문에 중앙에 강한 탄력의 속 빈 심지가 있고 주변에 가지런하고 완강한 털이 규칙적으로 붙어 있으나 털은 중앙 심지가 없이 그저 보드랍기만 하다. 때문에 뻣뻣한 깃은 주로 날개와 꼬리 등 몸체의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으며 털은 알을 품고 새끼를 양육하는 등 보온에 쓰기 위해 가슴과 배 등 하층부에 집중적으로 나 있다.

  또 깃은 공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도록 유선형으로 납작하고 매끄러우나 반대로 털은 더워진 공기를 가급적 많이 함유하기 위해 목화솜보다 더 곱고 더부룩하다. 깃은 공기를 가급적 쫓아내는데 쓰이나 털은 공기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붙들어 두는 역할을 한단 말이다.

  깃(Feather)은 철저한 공기역학적 양력 이론의 지배를 받고, 털(Down)은 생리학적 모성 이론의 배려를 받는다. 한 몸에 나 있는 깃과 털인데도 이처럼 위치에 따라 정반대의 역할을 수행한단 점은 구조학이란 한갓 과학적 재미를 넘어서 생리학의 윤리적 숭고함마저 깊이 깨닫게 해준다.

  잠시 부엉이 사건의 추이를 추적하는 중에 고맙게도 심장이 슬그머니 제 박자를 잡아 줬고, 눈길을 다시 어두운 수풀로 돌려보지만 그 어디에도 반딧불이의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밤 산책 나올 때부터 이미 각오한 일, 유일하게 한 마리 겨우 발견됐던 가파른 수직 벼랑, 토종 벌집 근처에도 흔적 없긴 마찬가지다.

 

  제법 멀리까지 오르막 밤길을 걷는데도 다른 때와는 달리 마주치는 차량이 없다. 밤은 깊어도 정갈하고 깊이 감춰진 자연의 본질을 찾아 이 시절이면 휴가객이 그치지 않을 한창 시절인데도 말이다. 안온하고 잠잠한 심사를 방해받지 않는 시간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검고 어두운 수풀의 포근함에 오랜 동안 눈을 주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의식적 최면 상태로 빠져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걷고 있는지 멈춰 서 있는지 모를 정도로 발걸음이 먼저 의식을 떠난다. 문득 돌아보면 깊은 사고의 늪에 빠져 한곳에 멍청하게 멈춰서 있는 자신을 알아채는 경우도 많다.

  온갖 상념들에 채이고 휩쓸리는 의식의 세계는 스스로 조절이 불가능한 독단의 세계다. 그 안에서 오롯한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 가고 나만의 세계도 구축해 가며 용서받을 수 있을 정도의 무책임함으로 바깥 정황들을 모두 잊어버린다.

  지극히 비밀스런 내 사색의 정원은 이래서 반딧불이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깊숙한 어둠 속에 있어도 결코 찬란함을 잃는 법이 없으며, 고요 속에 머물러 있어도 활발하게 살아 움직이는 아우성이 소리 없는 공간을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맘먹고 오랜만에 나온 밤 산책인데 길이를 길게 잡을 순 없을 것 같아 오르막을 1킬로 정도에 그치고 언덕을 다시 되짚어 내려오기 시작한다. 올라갈 때 미처 발견되지 않았던 검은 흔적이 다시 도로 위에 군데군데 비친다.

  에구머니! 랜턴 불빛 아래 씨알이 제법 굵어진 풀무치 메뚜기의 마른 몸들이 즐비하다. 각기 풀무치의 몸엔 작고 붉은 불개미들이 어지럽게 붙어 있어 야심한 밤에도 제 의무를 다하는 중이다.

  교통사고가 원인이라면 외모가 저처럼 말짱할 리는 없을 풀무치가 무슨 이유로 일정한 곳에 이처럼 집중적으로 떨어져 죽어있는지 도무지 원인을 알 길이 없다. 수명을 다하긴 아직 한참 이른 철인대도 불구하고 말이다. 큰놈은 가운데 손가락 굵기와 길이를 훌쩍 넘는 녀석도 있다.

  이쯤 되면 평화롭고 고적한 사색의 시간은 그만 물 건너가 버리고 만다. 아무리 생명이 없어진 풀무치들이지만 함부로 밟아버리고 싶진 않다. 발로 밟는다 하더라도 느낌이 올 정도는 아니겠으나 기왕에 눈에 띈 이상 피해 갈 수 있을 만큼은 피해가야 한다. 거기 붙어있는 무수한 불개미들도 하나같이 충실하고 무고한 녀석들일 뿐 밟혀 죽을 이유가 없음이고, 도로뿐 아니라 내 의식이 함께 오염되는 경우는 무조건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도로 위를 희미하게 비추는 풀무치의 흔적을 살펴 피하며 걷는 시간도 도정을 해쳐가기 위한 과정으로 소용될 수 있음은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나가나 돌아오나 늘 혼자인 것이 오늘따라 새삼스럽다.

  현관문 소리가 쓸쓸할 것 같아 일부러 걸음을 멈추고 뒷짐을 진 채 뜨락 주변 어두운 수풀을 깊이 주목해 보지만, 밖에서 찾을 수 없었던 희망의 불빛을 안에서도 역시 찾을 수가 없다. 같은 푸른빛일지라도 행복의 파랑새는 날 기다려 주지 않았고 그의 전설도 오늘은 맞지 않는 날이다. 가벼운 바람결에 실려 풍겨오는 보랏빛 칡꽃의 달콤한 향기가 허전함을 대신 위로해 준다.

  미리 단단히 각오를 하고 떠난 산책길이었기에 찾을 걸 찾지 못하고 되돌아와도 크게 서운한 점은 없다. 파랑새의 행복한 날개는 아닐지라도 부엉이가 남긴 꿈의 날개 한 조각은 내 위 주머니에 든든하게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커피 주전자에 물이 끓음을 기다리는 동안 뜬금없이 올려다본 동편 하늘에 좀 전까지 황금색으로 휘황하던 달빛은 그새 눈부신 백금색으로 바뀌어 중천에 높이 떠올라 있었다. 덕분에 가득하던 만월 주변의 별빛은 거의 지워지고 남은 게 별반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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