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설해목

조회수 14892 추천수 0 2013.01.24 22:59:18

(설해목)

 

  사진100310 008.jpg

 

가파른 산등성이를 힘겹게 타넘는 산마을의 겨울 해는 유난히 짧다. 겨울 해가 짧은 만큼 겨울의 꼬리는 반대로 길다. 산그늘이 겨울의 긴 꼬리를 따라 깊어지면 을씨년스러운 나무들 그림자도 함께 깊어진다.

 

인적도 드문 겨울 산골짜기에 밤이 깊어지면 천지는 조용한 정적에 파묻힌다. 그러나 산 전체가 소리도 없이 고스란히 잠들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거긴 바람결에 우는 나뭇가지도 있고 한창 제시간을 즐기기 시작하는 야행성 짐승들도 얼마든지 많다. 단지 주행성인 우리 인간들만이 정적에 빠지고 밤 세계로 더 깊숙이 들어갈 뿐이다. 우리 식대로 편하게 생각해서 그렇지 한밤중에도 대개의 산은 그렇게 열심히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다.

산이 살아서 움직인단 증거는 도처에 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물들의 숨소리가 와글거린다.

기온이 어쩌고 기압이 어쩌고 구태여 딱딱하고 재미없는 과학적 이유를 들어 논할 필요도 없이 한낮보다 특히 밤에 눈이 더 많이 오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그 또한 살아있는 산의 생명력이 조용한 밤에 더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인 것이다.

 

‘사르륵-사르륵’ 내리는 눈은 사진을 그림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명징하게 자태도 분명한 다채색 겨울 산, 컬러사진같이 분명한 모습을 그만 바탕도 단순한 흑과 백의 무채색 그림으로 잠깐 틈에 만들고 만다. 검 초록 일색인 소나무가지 위에도 어김없이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인다.

작은 바람에도 반쯤은 공중을 나르듯 소리 없이 내리는 솜털 같은 눈이라 해서 무게조차 없는 건 아니다. 밤새 내리는 눈의 자취는 나뭇가지 위에 고스란히 내려 쌓이고 마침 내린 눈이 끈기도 좋고 알도 굵은 찰 눈이라면 가지 위를 수북하게 덮는 건 잠깐 사이다.

한밤중, 조용한 산마을엔 그렇게 가지 위에 수북이 쌓인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해 힘없이 부러지는 나뭇가지의 비명소리가 ‘뚜두둑-딱’ 메아리 되어 울려 퍼진다. 살아있는 산이 외치는 비명처럼 온 계곡에 가득히 울려 퍼진다. 작은 소리조차 모두 매몰되어 지극히 고요한 산천에 홀로 울리는 비명, 가슴마저 서늘한 나뭇가지 비명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뒤 잔향만은 차가운 밤의 기운을 타고 꽤 오랫동안 귓가에서 떠나질 않는다.

있는 듯 없는 듯 그저 가볍고 보드라워 보이는 눈송이라도 가지 위를 조용히 덮으며 두께를 더해 가면 제아무리 굵고 강인한 나뭇가지라도 견디질 못할 정도로 무게가 느는 것이다. 수십 수백 년을 꿋꿋이 견뎌온 역전의 굵직한 나뭇가지가 어느 날 한순간의 눈 무게에 그만 어이없게도 손을 내리고 항서를 쓰고 마는 것이다. 아침이 되어 하얗게 제 속살을 드러낸 채 부러진 가지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나무들은 마냥 처량한 모습을 띄고 있으니, 이렇게 눈으로 인해 깊은 상처 입은 겨울나무들을 설해목이라 부른다.

특히 소나무 등 침엽수 종류는 바늘잎일지언정 한겨울에도 잎새를 다 떨구지 않는 사철나무이기에 제 알아서 미리 잎새를 다 털어내는 낙엽 활엽수에 비해 가지에 쌓이는 눈을 피할 수도, 떨굴 수도 없는 양상을 띄우기 마련이다. 그래서 설국 한복판을 오래 살아 주변정리가 된 소나무들은 옆으로 뻗은 곁가지가 적고 위로 곧게 뻗은 쓸모 있는 아름드리 둥치가 많다. 이름조차 황송하리 금강송(金剛松)이란다. 설국에서 오래 살아남은 역전의 침엽수들이기에 그런 호칭의 영예도 정당할 뿐 아까울 리 없음에, 역시 일생을 잔꾀에 의존하는 낙엽 활엽수에 노거목이 드문 반면, 수령 천년을 넘기는 대부분의 노거수는 절개 우직한 침엽수더란 사실은 감성에 의거한 나만의 관념적 비약은 아닐 것이다.

 

큰 나무는 탄력이 적어서 자신의 가지를 부러뜨려야 눈 무게를 이기지만 작은 나무는 나무 끝이 땅에 대일 정도로 둥글게 휘어져 온몸의 탄력으로 힘겨운 버티기에 들어간다. 어린 나무들의 유연성은 일견 대견해 보이기도 하지만 우선은 애처롭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보기가 딱해 도움을 줄 요량으로 가지를 툭 건드려주면 이때를 간절히 기다렸단 듯 ‘와르르’ 가지에 쌓인 눈을 떨구며 재빨리 제자리를 찾아 다시 일어선다.

잔뜩 허리가 꺾일 만큼 휘어져 있던 작은 나무들이 더 이상 버티질 못하고 그대로 꺾여버리는 경우도 드물다. 날씨 풀리고 눈도 녹으면 거의가 다시 허리를 펴고 제 모습을 찾는다. 다만 연이은 강추위에 쌓인 그대로 얼어붙은 눈덩이의 눌림이 워낙 극심해 목심부까지 상처가 깊은 경우엔 처음과 같이 완전한 복귀가 어려운 경우는 더러 있다. 그런 나무들은 한 폭 동양화에서나 볼 수 있는 멋들어지게 휘어진 모습을 언제까지나 간직하게 된다. 구불청 휘어짐이 나무에겐 혹독했던 계절의 증거이고 아픈 불구이자 상흔이겠지만, 우리 인간들은 그 꺾이고 휘어진 멋들어진 모습에서 그림도 한 폭 구하고, 시 한 구절도 얻는다. 허나 이것도 눈이 덜 오시는 지역에서나 가능한 일, 본판의 설국에선 한번 휘어진 나무는 결국 길게 버티질 못하고 언젠가 마저 꺾임으로써 소임을 끝내 접고야 만다.

 

그렇다. 사람에겐 가장 조용하고 정밀한 계절, 은근한 겨울잠에 들어야할 깊은 산 속 나무들은 오히려 일 년 중 가장 큰 힘을 들여가며 정중동(靜中動)의 안간힘으로 생과 사의 버티기를 치열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겨울나무가 얼마 되지 않는 제 에너지마저 성장과 번식에 쓰질 못하고 단지 개체생존을 위한 버티기에 모두 사용하느라 겨울날에 남겨지는 나이테는 유달리 짙고 근육처럼 단단하게 뭉쳐져 있어 언어보다 짙은 자취로 저간의 정황을 또렷이 기록하고 있다. 결국 부름켜에 기록된 성장의 증거로 나무들 나이를 세는 게 아니라, 온 용력을 다해 버텨낸 겨울의 증거인 굳은살, 색 짙은 고난의 흔적을 헤아려 하필 나무의 세월을 읽어낸단 뜻을 우린 모르는 사이에 계수하고 있음이다. 설해목, 이처럼 곁가지를 무참하게 떨군 덕분에 위로 곧게 뻗은 둥치만 눈에 남은들 원래부터 그렇겠지, 날이 풀려 부러지고 꺾인 상처가 아물면 겨울나무 안간힘의 속내를 사람들은 막상 겉으로 봐선 모른다.

이곳에서 진짜 겨울을 만나기 전엔 나 또한 오래된 나무가 제 가지를 함부로 부러뜨린 채 흉하게 서있는 모습에 그리 깊이 유념하지 않았었다. 그저 (멀쩡하게 생긴 나무가 아깝게 됐구나!) 라는 정도로 가벼운 관심뿐이었지만, 이젠 겨울나무가 생존의 무게를 오랜 동안 감당해 내려오면서 남긴 고난의 불가피한 흔적, 군더더기 덜어냄이야말로 노익장의 덕목이라고 단번에 이해할 줄도 안다.

 

쌀과 옥수수엿을 고아서 만드는 이 마을 고유의 동동주가 제대로 익는 시간은 이때가 가장 적절하다고 한다. 몇 대를 이어 자연에 잘 순응해 가며 삶을 영위하는 순박한 산골 사람들의 영혼도 달래주는 옥수수 동동주는 산 속 눈밭에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이같이 깊은 밤에 몰래 더 깊이 익어 간다고 한다.

 

** 자연수상록 ‘한 스푼’(어문학사)에서 전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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