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90도 '흰 사막', 수백만 년 생존 비법

조홍섭 2014. 03. 11
조회수 41233 추천수 0

이끼, 균류, 선충 등 남극 토착 생물이 빙하기 거쳐 생존 비결은 활화산

얼음 녹은 땅, 분기공, 동굴 등에서 적응해 진화…다른 곳에서도 '피난처' 가능성

 

a1_A man stands in a cloud of volcanic steam in the Antarctic South Sandwich Islands_pete convey.jpg » 남극에도 맨땅이 드러난 곳이 있다. 활화산 주변의 이런 땅은 토종 생물이 빙하기를 버티는 피난처가 된다. 사진은 남극 사우스 샌드위치 섬이다. 사진=피트 콘베이

 
펭귄, 고래, 물개, 크릴 등 남극 하면 떠오르는 동물이 남극을 생명이 풍성한 곳으로 여기게 한다. 하지만 이들은 남극 해안이나 바다에 기대어 사는 동물이어서 남극 대륙의 주인을 자처하기엔 좀 부족해 보인다.
 

내륙에선 영하 80~90도의 혹한이 오고, 1년 내내 눈에 덮여 있지만 극점 근처의 강수량은 연간 100㎜에 불과해 ‘흰 사막’이라고도 불린다. 강렬한 자외선이 내리쪼이는데다 햇빛 없는 겨울이 6개월이나 계속된다.
 

이런 곳에서도 생물이 산다. 그것도 우연히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수백만년 동안 이곳에 터잡고 살고 있는 생물이다. 이끼와 균류, 선충, 미소 절지동물 등이 그들이다.
 

지금도 춥지만 빙하기에 남극은 더 추웠고 얼음은 더 넓고 깊게 쌓였다. 그런데 화석과 유전자 자료를 보면 남극의 생물은 이런 빙하기를 여러 차례 극복해 살아남아 진화한 것으로 나타난다.

a2_Volcanic steam hovers over fields of mosses on the Antarctic South Sandwich Islands_pete convey.jpg » 남극에도 화산의 수중기가 뿜어나오는 곳에는 이끼가 돋아난다. 사진=피트 콘베이

 

세리드웬 프레이저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 진화생물학자 등 국제연구진은 과학저널 <미 국립과학원회보> 11일치에 실린 논문에서 남극에 분포하는 화산이 생물이 생존할 피난처 구실을 했다는 주장을 폈다. 이 연구는 남극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지열이 나오는 곳이 생물진화에 중요한 구실을 할지 모른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연구진은 10곳의 활화산 지역을 포함해 43곳에서 지금까지 이뤄진 생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공간 모델링 기법을 이용해 생물다양성과 화산지대의 관련성을 분석했다. 남극에서 화산활동이 활발한 곳은 북부의 남극 반도 등 3곳으로, 여기엔 눈이 녹아 드러난 땅, 연못, 증기가 뿜어나오는 분기공, 지열의 증기로 생긴 동굴 등이 분포한다.
 

분석 결과 화산활동으로 지열이 나오는 곳에서 그렇지 않은 곳보다 생물다양성이 훨씬 높았다. 지열 지대로 가까이 갈수록 생물종이 많아지는 양상도 분명했다.
 

a3_Volcanic steam rises out of a fumarole, surrounded by lush mosses and other lifeforms, on the Antarctic South Sandwich Islands_pete convey.jpg » 남극 사우스 샌드위치 섬의 화산 분기공 주변에 이끼 등 생물이 번창하고 있다. 사진=피트 콘베이

 

특히, 식물인 이끼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제까지는 이끼의 분포를 미소 기후조건이나 위도로 설명했을 뿐이다. 또 가벼운 이끼의 포자가 어딘가 다른 곳에서 날아왔을 것으로 여겼지만 실은 지열 지대에서 꿋꿋하게 빙하기를 견딘 것이었다.
 

남극에는 지의류를 이루는 균류가 많은데, 이들은 기후에 적응해 수백년 동안 느리게 자라고 영하 196도에도 죽은 듯이 말라붙었다가 살아나는 강인한 면모를 보인다. 이끼만큼은 아니지만 지열 지대는 이들에게도 피난처 구실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빙하가 몰려오면 생물은 깡그리 사라지는 게 아니라 피난처에서 간빙기를 기다린다. 이 과정에서 생물은 다양한 형태로 진화해 다양성이 높아진다. 유전적 증거를 보면, 어딘지는 몰라도 ‘숨겨진 피난처’가 있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번 연구는 화산활동에 의해 지열이 높은 곳이 그 유력한 후보일 가능성을 제시한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Ceridwen I. Fraser et. al., Geothermal activity helps life survive glacial cycles, PNAS, www.pnas.org/cgi/doi/10.1073/pnas.1321437111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 메일
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메일 : ecothink@hani.co.kr       트위터 : eco_think      

최신글




최근기사 목록

  • ‘3D 가짜 거북 알’로 불법 유통망 추적‘3D 가짜 거북 알’로 불법 유통망 추적

    조홍섭 | 2020. 10. 23

    코스타리카서 현장 시험 성공, 1시간마다 위치 정보 전송입체(3D) 프린터로 만들어 겉모습은 진짜와 똑같고 안에는 위성 위치추적 장치를 넣은 가짜 거북 알이 개발돼 불법 채취꾼을 잡고 유통망을 파악하는 데 쓰일 수 있게 됐다. 중미 코스...

  • 우리 몸엔 늦가을과 늦봄 두 계절만 있다우리 몸엔 늦가을과 늦봄 두 계절만 있다

    조홍섭 | 2020. 10. 22

    늦가을엔 바이러스 감염 대응…‘겨울잠’ 단백질도 많아져온대지역에 사는 사람이라면 4계절은 가장 분명한 환경 변화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몸은 4계절이 아닌 2계절을 산다는 사실이 분자 차원의 추적 연구결과 밝혀졌다.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자...

  • 꽃샘추위 한 번에 어린 제비 사망률 곱절로꽃샘추위 한 번에 어린 제비 사망률 곱절로

    조홍섭 | 2020. 10. 21

    더워진 봄 산란 앞당기면 새끼 굶주릴 위험 커져, 30년 장기연구 결과기후변화는 평균으로 오지 않는다. 봄은 일찍 찾아오고 평균기온은 오르지만 꽃샘추위는 잦아진다. 동물이 기후변화에 적응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이 장기 현장연구로 밝혀...

  • 한국인에는 비만과 당뇨 막는 ‘쌀밥 유전자’ 있다한국인에는 비만과 당뇨 막는 ‘쌀밥 유전자’ 있다

    조홍섭 | 2020. 10. 19

    인도보다 3천년 앞서 쌀 재배, 고혈당 막는 유전적 적응 일어나한국인을 비롯한 동아시아인은 오랜 벼농사 덕분에 고탄수화물 식사로 인한 비만과 당뇨병 등의 부작용을 막는 유전적 적응을 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오랜 목축 역사가 있는 유럽 ...

  • 냄새로 코로나 검사, 개 활용 연구 활발냄새로 코로나 검사, 개 활용 연구 활발

    조홍섭 | 2020. 10. 16

    헬싱키 공항 현장 배치…80∼90% 정확도 감염자 실시간 찾아요양원 식구들이 아침마다 돌아가며 개와 아침 인사를 나누는 것만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됐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사람보다 10만배나 뛰어난 개의 후각을 이...

최근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