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관찰 기록, 카메라보다 연필

조홍섭 2013. 10. 14
조회수 29605 추천수 1

자연 연구자는 관찰 결과를 어떻게 왜 기록할까, 12인의 저명 과학자 글 모음

기록은 새로운 생각의 원천, 나중 과학자를 위한 기초자료 구실도

 

표지 과학자 관찰노트.jpg

 

과학자의 관찰 노트-자연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12가지 방법
마이클 캔필드 엮음, 김병순 옮김/휴먼사이언스·2만4000원
 
지난달 덕유산 향적봉 식물탐사 때였다. 구절초, 산오이풀, 용담…. 가을 야생화를 보자 모두 디지털카메라로 사진 찍기에 바빴지만 한 대학생은 작은 스케치북을 꺼내 그리기 시작했다. 식물의 특징적 부분은 따로 그리고 여백엔 설명을 넣었다. 하산길에서 확인됐지만, 간편하고 빠르게 사진을 찍은 이들보다 좀 굼뜨더라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대학생이 식물을 훨씬 자세하고 깊이 있게 기억했다.
 

na2.jpg » 찰스 다윈이 1831년 비글호 항해 기간 갈라파고스에서 바다이구아나에 관해 남긴 관찰 노트.

 

자연사학자이든 자연애호가이든 자연 속에서 보고 느낀 것을 기록으로 남긴다. 요즘은 디지털 기기가 대세이지만 다윈 이전부터 자연사 연구자가 기록하는 오랜 전통은 ‘종이와 연필’을 쓰는 것이다. 동물이나 식물, 화석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관찰 노트를 작성한다.
 

이 책은 세계적인 자연사 연구자 12명의 관찰 노트를 소개한다. 관찰 노트 또는 필드 노트는 현장에서 한 메모, 숙소나 연구실에 돌아와 메모를 보고 정리한 일기장이나 일지, 데이터 표 등을 포괄한다. 자연 연구자들이 관찰한 것을 어떻게 기록하고 연구에 활용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책이다.
 

na3.jpg » 조지 셀러가 1982년 중국 스촨성에서 대왕판다를 따라다니며 죽순 먹은 곳과 배설한 곳을 기록한 관찰 노트.

 

기록은 자연 연구자에겐 숙명과도 같은 일이다. 조지 셀러는 1980년 당시 보전의 중요성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대왕판다를 중국 스촨성에서 며칠씩 따라다니며 똥덩어리의 수와 크기, 무게, 성분을 기록했다.

 

하루에 97개의 똥을 누고 대나무가 대부분인 그 무게가 20㎏이 넘는 것을 밝혔다. 판다 서식지 보호에 나설 기초자료가 이렇게 쌓여 갔다.
 

관찰 노트를 작성하는 건 무엇보다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데이터뿐 아니라 관찰 과정의 개인적 소감이나 느낌을 기록해 두면 나중에 대중적인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된다.

 

na4.jpg » 고생물학자 애나 케이 베렌스마이어가 현장에서 작성한 상세 지질도.  
 

이런 기록은 자신뿐 아니라 후대의 자연 연구자에게 소중한 자료가 된다. 애나 케이 베렌스마이어 미국 스미소니언 연구소 고생물학자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암석 지층을 파헤치는 것처럼, 지금도 새로운 정보가 필요하면 관찰 노트들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면밀히 살펴본다. 내가 은퇴하면 그 노트들은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영구히 보관될 거라고 한다. 기분 좋은 일이다. … 컴퓨터 파일을 통해서는 그 위대했던 탐사와 발굴의 시대를 떠올릴 수 없다. 정말로 당시에 거기에서 있었던 일들, 함께 일했던 동료들, 가슴 설렌 흥분과 예리한 통찰력을 지금도 생생하게 느끼고 싶다면 손으로 쓴 이 특별한 일지들을 한 장 한 장 넘겨 봐야 한다.” (163쪽)


실제로 꼼꼼한 관찰노트는 훌륭한 과학적 데이터가 된다. <월든>을 쓴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 호수 근처에서 2년간 살면서 약 500종의 식물이 언제 꽃을 피우는지 상세히 기록했다.

 

최근 생태학자들은 같은 지역을 조사해 160년 사이 소로가 기록한 종의 약 30%가 사라졌고, 또 다른 40%는 매우 희귀해 졌음을 알 수 있었다. 소로는 당시에는 짐작할 수도 없던 기후변화와 개발의 영향을 연구할 기초자료를 만들었던 것이다.(■ 관련 기사: 150년 만에 드러난 소로의 숨겨둔 선물)

na7.jpg » 보름달물해파리의 관찰 노트.
 
그러나 관찰 노트는 단지 기록된 것 이상이기도 하다. 대화나 토론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듯이 노트를 다시 옮겨 적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고 새로운 통찰이 나오기도 한다.    
 

‘달리는 과학자’로 유명한 베른트 하인리히는 길바닥에 떨어진 나무 잎사귀에는 유독 벌레 먹은 게 많다는 메모를 해 두었는데, 나중에 벌레의 천적인 새들이 벌레 먹은 흔적으로 먹이를 찾기 때문에 이를 감추기 위해 벌레가 먹던 잎을 떨어뜨린다는 발견으로 이어졌다.
 

그저 겉핥기로 구경하거나 사진기에 기록을 맡기지 않고 직접 노트에 적어넣거나 그림을 그리려면 관찰이 훨씬 꼼꼼하고 치밀하게 된다. 끈덕진 관찰자에게만 자연은 속살을 보여준다.
 

na6.jpg » 동물학자이자 예술가인 조너선 킹던이 스케치한 붉은꼬리원숭이의 여러 자세.

 

연구자들은 또 그림 솜씨와 무관하게 관찰 노트에 그림을 넣으라고 강력하게 충고한다. 그림은 사진과 달리 눈과 함께 머리로 그리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표현한다. 유명한 식물도감과 조류도감이 그림으로 돼 있는 것도 특징을 도드라지게 보여주는 데는 그림이 사진보다 윗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가이자 동물학자인 조너선 킹던은 “연필은 … 보이지 않는, 문제가 되는 조직을 찾으려고 애쓰는 외과 의사의 절개용 메스와 같다”고 말한다.
 

na8.jpg » 표본을 보고 색연필로 그린 바실리스크도마뱀. 생물의 색깔을 기록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과학의 길과도 통한다. 과학전문 일러스트레이터인 제니 켈러는 그림의 미덕을 이렇게 말한다.
  

정확하게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접근 방식, 끈질긴 관찰, 불가측성에 대한 열린 자세, 한 주제를 여러 관점에서 볼 줄 아는 능력, 흥미진진한 것과 평범한 것에 모두 주목하고, 선입관에 빠지지 않도록 철저히 주의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은 물론 과학을 할 때도 필요한 접근 방식이다.”(266쪽)
 

노트북 컴퓨터, 디지털카메라, 스마트폰, 지피에스(GPS) 좌표 기기 등 편리한 전자기기가 기록을 편리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상당자 자연 연구자들은 종이와 연필을 고집한다.
 

na9.jpg » 미술가이자 자연사학자인 클레어 에머리가 기록한 덤불 나비의 관찰 노트.

 

잉크는 전자의 단순한 분극보다 더욱 항구적이다. 우선, 잉크는 자기장의 영향으로 변질되지 않으며, 인간의 시각 인지 체계(다시 말해, 읽기)는 세월이 흘러도 기본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수첩은 지금도 여전히 기록을 보관하는 필수 수단이다. 수첩은 또한 어떤 기상 상황에서도, 전기 공급이 끊어져도 기록할 수 있다.”(로저 키칭, 116쪽)
 
“관찰노트는 (비가 오나 햇볕이 내리쬐나) 어떤 순간에도 기록할 수 있으며, 전지가 닳아 없어질까 고심하지 않아도 되고, 떨어뜨려도 망가지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GPS 좌표를 노트에 기록하는데, 디지털 파일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파손되는 경우를 대비한 조치다.”(애나 케이 베렌스마이어, 146쪽)


na1.jpg » 에드워드 윌슨이 1955년 스리랑카에서 나무에 사는 흑개미를 기록한 관찰 노트.


이 책은 관찰 노트를 작성하는 방법과 그림 그리는 법 등을 안내하고 있기는 하지만 본격적인 실용서는 아니다. 오히려 자연 속에서 현장연구를 하는 과학자들의 연구과정을 이해하고 그들의 ‘종이와 연필’ 사랑을 엿보게 해 주는 책이다.

 

오죽하면 사회생물학의 거장 에드워드 윌슨은 자신에게 천국은 탐사할 자연과 “끝없이 쓸 수 있는 노트”가 있는 곳이라고 했을까.
 

글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사진=휴먼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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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메일 : ecothink@hani.co.kr       트위터 : eco_th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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