멧돼지도 도구 사용한다-나무껍질로 '삽질'

조홍섭 2019. 10. 17
조회수 9665 추천수 1
번식 둥지 만들 때 코 대신 사용…동료와 새끼에 지식 전파도

s1.jpg » 필리핀의 비사얀 섬에만 극소수가 남아있는 위급종 미사얀혹돼지. 동물원 개체에서 도구 사용 행동이 발견됐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사람만이 도구를 사용한다는 생각은 깨진 지 오래다. 침팬지 등 영장류는 물론 까마귀와 일부 물고기도 도구를 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런 동물 목록에 멧돼지도 오르게 됐다.

메레디스 루트-베른슈타인 프랑스 인류박물관 연구원 등 프랑스 연구자들은 파리동물원에서 기르는 필리핀 고유종 멧돼지인 비사얀혹돼지 3마리가 도구를 써 번식용 둥지를 만드는 행동을 관찰했다고 과학저널 ‘포유류 생물학’ 최근호에 실린 논문에서 밝혔다.

연구자들은 “도구 사용은 폭넓은 척추동물에서 보고됐다”며 “돼지는 ‘영리한’ 동물로 유명하고, 도구 사용과 관련 있는 형질도 많기 때문에 (도구 사용이 이제야 발견된 것이) 놀라운 일”이라고 논문에 적었다.

세계적 멸종위기종인 이 멧돼지 성체 암·수와 새끼 2마리는 80㎡ 넓이의 반 자연 울타리 안에서 길렀다. 루트-베른슈타인은 성체 암컷 멧돼지가 도구를 사용하는 것을 2016년 우연히 발견했다.

도구를 사용하는 비사얀혹돼지 유튜브 동영상(메레디스 루트-베른슈타인 제공)


“새끼를 낳을 둥지를 만들기 위해 나뭇잎을 물어다 놓고 코로 구덩이를 조금 팠다. 그러더니 곁에 있던 가로 40㎝, 세로 10㎝ 길이의 나무껍질을 물고 왔다. 입에 문 나무껍질로 꽤 활기차게 반복해서 흙을 밀고 들어 올렸다. 흙 파기 동작은 6∼8차례 되풀이됐다.”

연구자들은 이후 1년에 두 차례 벌어지는 번식기 둥지 만들기 때마다 이런 행동을 3마리의 멧돼지가 하는 것을 관찰했다며 “돼지가 도구를 사용한다는 관찰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s2.jpg » 나무막대로 얼마나 깊은지 재면서 물을 건너는 고릴라. 도구 사용은 동물계에 꽤 널리 퍼져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영장류는 먹이를 얻거나 가공하고 무기로 도구를 쓰기도 한다. 제인 구달이 발견한 침팬지의 나뭇가지를 이용한 흰개미 낚시는 유명하다. 이 발견 이전에는 사람만이 도구를 만들어 쓴다고 알려졌다.

이후 영장류 이외에도 나뭇가지를 파리채 삼아 파리를 쫓는 아시아코끼리, 해면을 사냥도구로 쓰는 호주의 큰돌고래, 조개를 깨뜨려 여는 데 쓰는 돌을 간직하는 해달, 뾰족한 나뭇가지로 나무껍질 속 애벌레를 끌어내는 뉴칼레도니아까마귀, 조개를 물고 바위에 떨어뜨려 깨뜨리는 놀래기 등 수많은 사례가 밝혀졌다.

도구 사용은 먹이를 파내고 꺼내서 먹거나 둥지를 만드는 동물에서 흔히 관찰된다. 먹이 채취는 눈에 안 보이는 먹이를 떠올리고 몸의 기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도구 사용으로 이어지기 쉽고, 둥지 만들기는 자연적인 재료를 조작해 원하는 물건을 만드는 과정이 도구 사용과 통한다. 

연구자들은 “돼지는 먹이 채취와 둥지 만들기를 모두 한다”고 설명했다. 돼지의 도구 사용을 가로막은 제한 요인은 손가락이나 부리가 없어 물체를 정교하게 움켜쥘 수 없다는 점이다.

도구 사용법을 학습해 그 지식이 전파됐을 가능성도 있다. 연구자들은 “나무껍질로 땅파기 기술이 어디서 기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숙련도와 사용 빈도에 비춰 암컷 성체가 딸과 수컷 성체에 지식을 전파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s3.jpg » 코를 써도 구덩이를 쉽게 팔 수 있는데 왜 도구를 쓸까. 단지 ‘기분이 좋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고 연구자들은 밝혔다. 루실 코르니에, ‘포유류 생물학’(2019) 제공.

물론 나무껍질 삽질은 그저 코로 땅을 파는 것에 견줘 그다지 효율이 높은 것은 아니다. 또 도구를 사용해서만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연구자들은 “돼지의 도구 사용이 특별한 기능적 이득이 없는 문화적 행동에 가깝다”고 해석했다. 또 “야생 개체에서 이런 행동이 나타날 수 있지만, 아직 관찰된 적은 없다”고 덧붙였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Meredith Root-Bernstein et al, Context-specific tool use by Sus cebifrons, Mammalian Biology 2019, https://doi.org/10.1016/j.mambio.2019.08.003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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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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