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적 피해 더 센 놈 옆에 둥지 트는 벌새

조홍섭 2015. 09. 16
조회수 45673 추천수 0

참매 둥지 근처에 벌새 천적 어치 얼씬도 못해 안전지대 형성

참매 둥지서 170m 이상 떨어지면 번식성공률 절반 이하로 떨어져

 

hum_Harold F. Greeney, Yanayacu Biological Station.jpg » 미국 애리조나주에 서식하는 검은뺨벌새. 이 작은 새는 이 지역 최상위 포식자 둥지에서 안전지대를 발견했다. 사진=해럴드 그리니, 야나야쿠 생물학연구소  
 
최상위 포식자는 먹이를 잡아먹어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한다. 그러나 직접 잡아먹는 것 말고도 중간 포식자의 행동을 제한하는 등 간접적인 효과도 크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국 애리조나주 치리카와 산에는 참매와 새매가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한다. 어치는 중간 포식자인데 매를 끔찍하게 싫어한다.
 

hum4.jpg » 이 지역 최상위 포식자인 흰참매. 나무 위에서 빠른 속도로 밑을 지나는 새를 낚아챈다. 사진=해럴드 그리니, 야나야쿠 생물학연구소


이들 매는 높은 나무줄기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아래로 지나가는 새를 쏜살같이 덮치는 사냥술을 주로 쓴다. 어치는 매 둥지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이 지역에 사는 검은뺨벌새는 다 자라야 길이가 9㎝인 작은 새이다. 이들은 나뭇잎과 거미줄을 섞어 둥지를 만들고 커피콩 크기의 알을 낳는다.
 

hum5.jpg » 벌새의 둥지(오른쪽 중간 나무 줄기 위에 위치)에서 알을 꺼내 삼키는 어치. 사진=해럴드 그리니, 야나야쿠 생물학연구소

 

hum3_Harold F. Greeney4, Yanayacu Biological Station.jpg » 어치에도 먹여야 할 새끼가 있다. 그러나 목숨까지 걸 일은 아니다. 사진=해럴드 그리니, 야나야쿠 생물학연구소


벌새가 가장 무서워하는 천적은 어치이다. 벌새의 둥지를 찾아내면 알을 모두 꿀꺽 삼켜 버리기 때문이다.
 
해럴드 그리니 에콰도르 야나야쿠생물학연구소장 등 국제 연구진은 온라인 과학저널인 <사이언스 어드밴시스> 4일치에 실린 논문에서 검은뺨벌새가 매 둥지 근처에 둥지를 틀어 어치의 위험을 피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연구자들은 벌새 둥지 342개와 매 둥지 12곳을 조사했는데, 벌새 둥지의 80%가 매 둥지 근처에 있었다.
 
매 둥지로부터 반지름 300m 안에 있는 벌새 둥지의 번식 성공률은 19%였는데, 반지름 170m 안에 있는 벌새는 그 비율이 52%나 됐다.

 

hum6.jpg » 참매의 둥지(노란 점)를 정점으로 벌새에게 안전한 원추형 안전지대가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붉은 점은 어치의 둥지, 녹색 점은 벌새의 둥지. 그림=해럴드 그리니, 야나야쿠 생물학연구소
 
매 둥지에서 먼 벌새의 둥지는 거의 모두 어치의 공격을 받았다. 매 둥지 바로 밑에는 어치가 접근하지 못하는 원추형의 안전지대가 있는 셈이다.
 
아마도 벌새는 다른 벌새가 안전하게 새끼를 길러내는 것을 보고 이를 흉내냈거나, 아니면 그저 시행착오를 통해 이런 기막힌 안전지대를 찾아냈을 것이다. 벌새는 해마다 같은 장소에 둥지를 트는 경향이 있는데 한 번 털린 곳에는 다시 깃들지 않는다.

 

hum2_Harold F. Greeney5, Yanayacu Biological Station.jpg » 참매 둥지 밑에 둥지를 짓고 커피콩만 한 알을 낳아 번식하는 검은뺨벌새. 사진=해럴드 그리니, 야나야쿠 생물학연구소
 
물론, 매도 잡을 수 있다면 벌새도 마다하지 않는다. 들이는 노력에 견줘 벌새보다는 어치나 쥐 같은 상대적으로 큰 먹이 사냥을 선호할 뿐이다.
 
어쨌든 최상위 포식자인 매가 중간 포식자인 어치를 견제함으로써 벌새의 생존 공간이 넓어졌다. 연구자들은 “기후변화 등으로 최상위 포식자가 사라진다면 그 영향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멀리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논문에서 밝혔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Harold F. Greeney et. al., Trait-mediated trophic cascade creates enemy-free space for nesting hummingbirds, Science Advances, 2015;1:e1500310 4 September 2015.

http://advances.sciencemag.org/content/1/8/e1500310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 메일
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메일 : ecothink@hani.co.kr       트위터 : eco_think      

최신글




최근기사 목록

  • 얼굴에 손이 가는 이유 있다…자기 냄새 맡으려얼굴에 손이 가는 이유 있다…자기 냄새 맡으려

    조홍섭 | 2020. 04. 29

    시간당 20회, 영장류 공통…사회적 소통과 ‘자아 확인’ 수단 코로나19와 마스크 쓰기로 얼굴 만지기에 어느 때보다 신경이 쓰인다. 그런데 이 행동이 사람과 침팬지 등 영장류의 뿌리깊은 소통 방식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침팬지 등 영장류와 ...

  • 쥐라기 바다악어는 돌고래처럼 생겼다쥐라기 바다악어는 돌고래처럼 생겼다

    조홍섭 | 2020. 04. 28

    고래보다 1억년 일찍 바다 진출, ’수렴 진화’ 사례 공룡 시대부터 지구에 살아온 가장 오랜 파충류인 악어는 대개 육지의 습지에 산다. 6m까지 자라는 지상 최대의 바다악어가 호주와 인도 등 동남아 기수역에 서식하지만, 담수 악어인 나일악어...

  • ‘과일 향 추파’ 던져 암컷 유혹하는 여우원숭이‘과일 향 추파’ 던져 암컷 유혹하는 여우원숭이

    조홍섭 | 2020. 04. 27

    손목서 성호르몬 분비, 긴 꼬리에 묻혀 공중에 퍼뜨려 손목에 향수를 뿌리고 데이트에 나서는 남성처럼 알락꼬리여우원숭이 수컷도 짝짓기철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과일 향을 내뿜는다. 사람이 손목의 체온으로 향기를 풍긴다면, 여우원숭이는 손목 분...

  • 뱀을 향한 뿌리 깊은 공포, 새들도 그러하다뱀을 향한 뿌리 깊은 공포, 새들도 그러하다

    조홍섭 | 2020. 04. 23

    어미 박새, 뱀 침입에 탈출 경보에 새끼들 둥지 밖으로 탈출서울대 연구진 관악산서 9년째 조사 “영장류처럼 뱀에 특별 반응” 6달 된 아기 48명을 부모 무릎 위에 앉히고 화면으로 여러 가지 물체를 보여주었다. 꽃이나 물고기에서 평온하던 아기...

  • 금강산 기암 절경은 산악빙하가 깎아낸 ‘작품'금강산 기암 절경은 산악빙하가 깎아낸 ‘작품'

    조홍섭 | 2020. 04. 22

    북한 과학자, 국제학술지 발표…권곡·U자형 계곡·마찰 흔적 등 25곳 제시 금강산의 비경이 형성된 것은 2만8000년 전 마지막 빙하기 때 쌓인 두꺼운 얼음이 계곡을 깎아낸 결과라는 북한 과학자들의 연구결과가 나왔다. 북한의 이번 연구는 금강산을...

인기글

최근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