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파리 침입하면, 매자나무 고의 '낙태'

조홍섭 2014.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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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안 씨앗 두 개, 기생 파리 감염 씨앗 죽여 나머지 씨앗 건져

씨앗 개수, 감염 여부 등 복잡한 판단…"식물에 지능 있을 가능성"

 

H. Zell_640px-Berberis_vulgaris_'Atropurpurea'_003.jpg » 유럽 매자나무의 열매. 이 식물에만 기생하는 기생 파리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낙태 전략을 오랜 진화과정에서 획득했다. 사진=H. 젤(H. Zell), 위키미디어 코먼스

 

식물이 그저 수동적으로 환경에 적응해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평생 붙박이 생활을 하지만 식물 가운데는 뛰어난 소통 능력을 보이는 것들이 적지 않다.
 

동료에게 위협이 닥쳤음을 알리고, 천적을 내쫓기 위한 물질을 분비하며, ‘적의 적’을 유인하는 식물의 놀라운 능력이 최근 잇따라 발견되고 있다 (■ 관련 기사: 새에게 "도와줘요", 식물은 ‘소통’의 달인).
 

이런 보고가 주로 식물의 생리학적 행동에 관한 것이라면, 생태학적으로도 식물이 복잡한 결정을 내리는 행동을 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눈길을 끈다. 카트린 메이어 독일 괴팅겐 대학 식물학자 등 국제연구진은 이론생태학 저널인 <아메리칸 내처럴리스트>에 실린 논문에서 유럽 매자나무의 ‘임신 중절’ 행동을 보고했다.
 

Janos Bodor_Rhagoletis_meigenii.jpg » 유럽 매자나무에 기생해 열매 속에 알을 낳는 테프리티드 초파리. 사진=야노스 보도르(Janos Bodor), 위키미디어 코먼스

 

유럽 매자나무는 우리나라 백두대간에 주로 분포하는 매발톱나무나 경기도에 많은 매자나무와 함께 매자나무속의 식물인데, 가을에 탐스런 열매를 맺으며 날카로운 가시가 달려있는 공통점이 있다. 유럽 매자나무에는 이 나무만을 노리는 전문적인 기생곤충인 테프리티드 초파리가 있다.
 

이 초파리는 매자 열매가 여물면 그 안에 침을 박아 알을 낳는데, 여기서 깨어난 애벌레는 씨앗 속에 들어가 씨앗을 파먹는다. 연구진은 이 파리가 같은 매자나무과의 뿔남천속에 포함되는 미국의 오리건 포도에 유럽 매자나무보다 10배나 많이 기생하는 사실에 주목했다.
 

오리건 포도는 유럽으로 건너온 지 200년이나 됐지만 토종 유럽 매자나무가 지닌 방어수단을 아직 획득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연구진은 유럽 매자나무의 열매 2000개를 채집해 일일이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며 기생파리가 열매에 구멍을 뚫어 알을 낳았는지를 조사했다.
 

그 결과 매자나무의 놀라운 기생파리 퇴치 전략을 확인했다. 매자나무는 파리 애벌레가 알을 낳은 씨앗의 발육을 중단시키는 ‘임신 중절’ 전략을 채택했던 것이다.
 

Arnstein Rønning_640px-Berberis_vulgaris_.jpg » 유럽 매자나무의 열매. 천적의 침입 여부와 가뭄 등 수분공급 상태와 같은 외부 여건과 열매에 씨가 몇 개인지 등 내부 여건을 고려해 매자나무는 임신중절 전략을 구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사진=아른슈타인 뢰닝(Arnstein Rønning), 위키미디어 코먼스

 

씨앗이 발육을 중단하면 그 속에 들어있던 기생파리의 애벌레도 먹을 게 없어 죽고 만다. 그런데 매자나무 열매 속에는 대개 씨앗이 2개 있기 때문에 기생을 당하지 않은 나머지 씨앗 하나는 건질 수 있게 된다.
 

조사 결과 기생파리가 알을 낳은 매자나무 열매 가운데 씨앗이 두 개 있는 것의 75%에서 ‘낙태’가 일어났다. 그럼으로써 매자나무는 기생파리의 애벌레에게 돌아갈 자원을 절약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매자나무의 열매에는 씨앗이 하나만 있다. 기생파리 애벌레가 제대로 자라려면 씨앗 하나로는 부족해, 평균 1.75개의 씨앗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씨앗 하나인 열매에서 매자나무가 취할 전략은 무엇일까. 연구자들은 열매가 하나인 매자나무에서 기생 당한 열매의 5%에서만 ‘임신 중절’이 일어났음을 확인했다.
 

Teun Spaans_640px-Zuurbes_R0021694.jpg » 유럽 매자나무의 개화 모습. 사진=토인 스판스(Teun Spaans), 위키미디어 코먼스

 

씨앗이 하나밖에 없는 상황에서 매자나무는 씨앗을 모두 버릴 것인지 아니면 애벌레가 자연적으로 죽을 가능성이 있는지 ‘판단’해야 한다. 조사 결과는 매자나무가 후자 쪽으로 ‘판단’했음을 보여준다. 기회가 조금이라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은 것이다.
 

연구진은 이 연구를 통해 유럽 매자나무가 열매에 씨앗이 몇 개 있는지 기억하고 있으며, 기생충의 위험이라는 외부 조건과 열매의 씨앗이 2개인지 1개인지에 관한 내부 조건을 통합해 간단한 추론을 하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임신 중절’이라는 조건부 행동을 하고 있으며, 씨앗이 먹힐 수 있다는 미래의 위험을 예견하는 등 복잡한 의사 결정을 하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연구에 참여한 한스-헤르만 툴케 괴팅겐 대학 연구자는 “식물이 이처럼 예견된 손실과 외부 조건들을 계량해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모두 깜짝 놀랐다. 우리 연구가 주는 메시지는 이제 식물의 지능이 생태학적 가능성의 영역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라고 이 대학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Katrin M. Meyer et. al., Adaptive and Selective Seed Abortion Reveals Complex Conditional Decision Making in Plants,The American Naturalist, Vol. 183, No. 3 (March 2014), pp. 376-383, http://www.jstor.org/stable/10.1086/675063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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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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