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 개화' 희귀식물 대청부채의 비밀

조홍섭 2020. 0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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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인 범부채와 교잡 피하려 ‘개화 시간 격리’ 드러나


d1.jpg » 부채처럼 펼쳐진 잎과 분홍빛이 도는 보랏빛 꽃이 아름다운 멸종위기 식물 대청부채. 생식 격리를 위해 개화 시간을 조절하는 특이한 생태가 밝혀졌다. 국립생물자원관 제공.


모든 꽃이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는 것은 아니다. 잠잘 ‘수(睡)’가 이름에 붙은 수련과, 얼레지 같은 일부 봄꽃은 저녁에 꽃을 오므린다. 반대로 달맞이꽃, 분꽃, 노랑원추리 등은 밤에만 꽃을 피운다.


대청부채는 특이하게 오후 3∼4시께 개화해 밤 10시쯤 오므린다. 이 식물의 개화 시간이 유명한 이유는 워낙 희귀하고 아름다운 데다, 처음 이런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 뱃시간과 맞물려 조사자들을 골탕 먹이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인천항을 떠나 점심 때쯤 백령도 자생지에 도착해 보면 꽃잎을 꽉 닫은 상태다. 이미 졌나, 해서 이튿날 아침에 다시 가보면 꽃은 여전히 빨래를 비틀어 짠 듯 오므려 있다. 점심때면 정기여객선이 나가는데, 개화한 모습을 보려면 하루 더 머물러야 한다.”(현진오 동북아 생물다양성센터 소장).


d2.jpg » 활짝 핀 대청부채. 개화 시간과 한반도 유래의 기원 등 풀어야 할 비밀이 많은 희귀식물이다. 현진오 박사 제공.

대청부채 개화 시간의 미스터리가 풀렸다. 유전적으로 가까운 범부채와 교잡종이 발생하는 걸 막기 위해 “개화 시간을 격리한 결과”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루렁 중국 베이징 산림대 식물학자 등은 과학저널 ‘린네 학회 생물학 저널’ 최근호에 실린 논문에서 이런 가설을 제기했다.


꽃가루 공급 조절과 꿀벌의 기억력이 비결


대청부채와 범부채는 얼마 전까지 각각 독립된 속으로 분류됐지만 최근 유전적으로 가까운 것으로 밝혀져 모두 같은 붓꽃 속으로 분류된다. 이들이 다른 종으로 분리된 지 오래되지 않았음은, 두 종의 염색체 수가 같고 인공적으로 교배하면 생식능력이 있는 교잡종이 생기는 데서 알 수 있다.


중국에는 이들 두 종이 같은 지역에 자생하는 곳이 여러 곳 있다. 연구자들은 500m 이내 거리에서 두 종이 자생하는 베이징 북쪽 외곽의 타이양산 국가삼림공원에서 어떻게 두 종이 자연적으로 교잡을 이루지 않고 독립적인 종을 유지하는지 알아봤다.


d3.jpg » 범부채는 대청부채와 꽃의 형태와 구조는 많이 다르지만, 유전적으로 매우 가깝다. 현진오, 국립생물자원관 제공.

연구자들은 2017∼2019년 동안 범부채 자생지 40㏊와 대청부채 자생지 23.5㏊에서 두 종의 꽃가루받이를 관찰했다. 두 식물의 개화기는 7∼8월로 비슷했다(우리나라에선 범부채 7∼8월, 대청부채 8∼9월). 그러나 “자생지에서 두 종의 자연 잡종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연구자들은 밝혔다. 무엇이 두 종의 교잡을 막는 장벽 구실을 할까.


먼저 가루받이 곤충을 조사했더니 재래꿀벌이 두 종의 꽃가루를 모두 모으는 것으로 나타났다. 꿀벌이 범부채의 꽃가루를 묻히고 이어 대청부채를 방문한다면 교잡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를 방지하기 위한 교묘한 장치가 마련돼 있었다.


조사 결과 두 식물의 개화 시간이 달랐다. 범부채가 오전 7시 15분∼8시 15분에 개화해 오후 6∼7시께 지고, 대청부채는 오후 3시 45분∼4시 15분 개화해 밤 10∼11시 졌다. 범부채가 오전에 꽃이 핀다면 대청부채는 오후에 핀다.


그러나 오후 4∼7시 사이에는 두 식물이 모두 꽃을 피우는 기간이다. 개화 시간이 중복되는 동안 교잡은 어떻게 방지할까. 연구자들은 “두 식물의 꽃가루 공급량 조절과 꿀벌의 기억력이 장벽 구실을 한다”고 밝혔다.


d4.jpg » 범부채와 대청부채를 찾는 재래꿀벌의 방문 빈도 비교. 오전과 오후로 확연히 나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루렁 외 ‘린네 학회 생물학 저널’ (2020) 제공.

가루받이하는 꿀벌의 방문은 꽃이 핀 지 1시간 뒤 절정에 이르렀다. 벌들은 언제 어떤 꽃을 찾아가야 꽃가루를 얻을지 기억하고 있었다. 꿀벌의 범부채 방문은 오전 7시부터 11시 사이에 집중됐고, 교잡 가능성이 있는 오후에는 꽃가루가 고갈된다는 사실을 알고 찾지 않았다.


꿀벌이 대청부채를 찾는 시간은 오후 4시∼오후 7시에 집중됐다. 저녁 7시에 대청부채의 꽃가루는 아직 남았지만, 꿀벌은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밤 10시 대청부채의 꽃이 지기 전 나방이 방문해 꽃꿀을 빠는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자들은 “이처럼 하루 중 시간을 달리하는 방식으로 생식을 격리하는 예는 매우 드물다”고 밝혔다.


서해5도 이어 태안 무인도에도 분포


대청부채와 범부채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 몽골, 동아시아 러시아 등에 분포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대청부채는 분포의 남쪽 끝으로 학술 가치가 크고 분포지와 개체수가 적어 멸종위기종 2급으로 지정된 법정 보호종이다.


대청부채는 이창복 박사가 1983년 대청도에서 발견했다. 그는 “처음 (범부채의) 잡종이라 생각하여 얼이범부채라고 불렀으나 서해 고도에서 퍼져 나간 점을 고려함과 동시에 대청도에 정착한 사유가 있을 것 같이 느껴 대청부채라고 불렀다.”라고 밝혔다(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d5.jpg » 2013년 국립공원연구원이 충남 태안의 한 무인도에서 발견한 대청부채 군락의 모습. 소순구 국립공원연구원 박사 제공.

이후 대청부채는 백령도와 소청도에서도 발견됐고, 2013년에는 서해5도보다 훨씬 남쪽인 충남 태안의 한 무인도에서도 군락이 발견됐다. 지난해 10월 한국자원식물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대청부채의 보전생물학’을 포스터로 발표한 소순구 국립공원연구원 박사는 “중국의 대청부채가 내륙에 분포하는 것과 달리 우리나라는 모두 서해안에만 분포해 중국에서 종자가 해류를 통해 이동해 왔을 것이라는 추론이 나왔지만 증명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빙기 동안 육지였던 서해에 분포하던 대청부채가 간빙기가 오자 한반도 서해안의 고지대로 피난해 살아남았을 가능성도 있다”며 “이를 밝힐 유전학과 생물지리학 연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소 박사는 태안 무인도 대청부채의 개화시각을 2018년 9월 13일 측정했더니 3시 30분께였다고 밝혔다. 또 무인센서 카메라로 촬영한 결과 꽃은 말려 있다 풀리는 과정을 매일 되풀이하면서 2∼3회 피고 진 뒤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태안 대청부채의 개화 과정(2018. 9.13)


d6.jpg » 개화 직전의 꽃봉오리. 왼쪽에 돌돌 말려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가 보인다. 소순구 국립공원연구원 박사 제공.


d6-1.jpg » 꽃이 열리기 시작했다. 소순구 국립공원연구원 박사 제공.


d7.jpg » 6분 뒤 꽃이 거의 열렸다. 꽃이 피기까지 약 30분이 걸렸다. 소순구 국립공원연구원 박사 제공.


인용 저널: Biological Journal of the Linnean Society, DOI: 10.1093/biolinnean/blaa032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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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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