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적 피해 더 센 놈 옆에 둥지 트는 벌새

조홍섭 2015. 09. 16
조회수 40189 추천수 0

참매 둥지 근처에 벌새 천적 어치 얼씬도 못해 안전지대 형성

참매 둥지서 170m 이상 떨어지면 번식성공률 절반 이하로 떨어져

 

hum_Harold F. Greeney, Yanayacu Biological Station.jpg » 미국 애리조나주에 서식하는 검은뺨벌새. 이 작은 새는 이 지역 최상위 포식자 둥지에서 안전지대를 발견했다. 사진=해럴드 그리니, 야나야쿠 생물학연구소  
 
최상위 포식자는 먹이를 잡아먹어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한다. 그러나 직접 잡아먹는 것 말고도 중간 포식자의 행동을 제한하는 등 간접적인 효과도 크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국 애리조나주 치리카와 산에는 참매와 새매가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한다. 어치는 중간 포식자인데 매를 끔찍하게 싫어한다.
 

hum4.jpg » 이 지역 최상위 포식자인 흰참매. 나무 위에서 빠른 속도로 밑을 지나는 새를 낚아챈다. 사진=해럴드 그리니, 야나야쿠 생물학연구소


이들 매는 높은 나무줄기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아래로 지나가는 새를 쏜살같이 덮치는 사냥술을 주로 쓴다. 어치는 매 둥지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이 지역에 사는 검은뺨벌새는 다 자라야 길이가 9㎝인 작은 새이다. 이들은 나뭇잎과 거미줄을 섞어 둥지를 만들고 커피콩 크기의 알을 낳는다.
 

hum5.jpg » 벌새의 둥지(오른쪽 중간 나무 줄기 위에 위치)에서 알을 꺼내 삼키는 어치. 사진=해럴드 그리니, 야나야쿠 생물학연구소

 

hum3_Harold F. Greeney4, Yanayacu Biological Station.jpg » 어치에도 먹여야 할 새끼가 있다. 그러나 목숨까지 걸 일은 아니다. 사진=해럴드 그리니, 야나야쿠 생물학연구소


벌새가 가장 무서워하는 천적은 어치이다. 벌새의 둥지를 찾아내면 알을 모두 꿀꺽 삼켜 버리기 때문이다.
 
해럴드 그리니 에콰도르 야나야쿠생물학연구소장 등 국제 연구진은 온라인 과학저널인 <사이언스 어드밴시스> 4일치에 실린 논문에서 검은뺨벌새가 매 둥지 근처에 둥지를 틀어 어치의 위험을 피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연구자들은 벌새 둥지 342개와 매 둥지 12곳을 조사했는데, 벌새 둥지의 80%가 매 둥지 근처에 있었다.
 
매 둥지로부터 반지름 300m 안에 있는 벌새 둥지의 번식 성공률은 19%였는데, 반지름 170m 안에 있는 벌새는 그 비율이 52%나 됐다.

 

hum6.jpg » 참매의 둥지(노란 점)를 정점으로 벌새에게 안전한 원추형 안전지대가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붉은 점은 어치의 둥지, 녹색 점은 벌새의 둥지. 그림=해럴드 그리니, 야나야쿠 생물학연구소
 
매 둥지에서 먼 벌새의 둥지는 거의 모두 어치의 공격을 받았다. 매 둥지 바로 밑에는 어치가 접근하지 못하는 원추형의 안전지대가 있는 셈이다.
 
아마도 벌새는 다른 벌새가 안전하게 새끼를 길러내는 것을 보고 이를 흉내냈거나, 아니면 그저 시행착오를 통해 이런 기막힌 안전지대를 찾아냈을 것이다. 벌새는 해마다 같은 장소에 둥지를 트는 경향이 있는데 한 번 털린 곳에는 다시 깃들지 않는다.

 

hum2_Harold F. Greeney5, Yanayacu Biological Station.jpg » 참매 둥지 밑에 둥지를 짓고 커피콩만 한 알을 낳아 번식하는 검은뺨벌새. 사진=해럴드 그리니, 야나야쿠 생물학연구소
 
물론, 매도 잡을 수 있다면 벌새도 마다하지 않는다. 들이는 노력에 견줘 벌새보다는 어치나 쥐 같은 상대적으로 큰 먹이 사냥을 선호할 뿐이다.
 
어쨌든 최상위 포식자인 매가 중간 포식자인 어치를 견제함으로써 벌새의 생존 공간이 넓어졌다. 연구자들은 “기후변화 등으로 최상위 포식자가 사라진다면 그 영향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멀리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논문에서 밝혔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Harold F. Greeney et. al., Trait-mediated trophic cascade creates enemy-free space for nesting hummingbirds, Science Advances, 2015;1:e1500310 4 September 2015.

http://advances.sciencemag.org/content/1/8/e1500310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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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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