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수 낳은 ‘풍물의 고향’ 대청호 막지리

최수경 2019. 05.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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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치러 가자' 기세 높던 풍요로운 강마을…옥천군 퍼진 풍물이 자부심


01.jpg » 계족산에서 내려다본 대청호.


대전 충청지역 사람들에게 대청호는 어떤 의미일까. 벚꽃이 만발한 호숫가를 상춘객들이 한 바퀴 도는 드라이브 코스일까. 풍광을 벗 삼아 걸을 수 있도록 잘 조성된 오백리 길일까. 휴양과 관광을 위한 지역 자원이기 이전에, 대청호 물의 혜택을 받는 지역민으로서 이 물이 어디서 오고, 이 물을 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특별한 상황에 놓였는지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쉽게도 숨 쉬는 공기, 늘 먹는 물, 항상 옆에 있는 가족처럼, 우리는 존재에 대한 의심이나 궁금함이 별로 없다.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자연스럽도록 당연하게 여긴다. 


대청호가 자리한 지역은 원래 금강이 흐르는 물줄기이다. 강변 지역은 대청호로 인해 수몰되면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이 사라졌다. 많은 사람이 터전을 떠났다. 이주비용으로 타지로 갔거나, 떠나온 고향 집이 봄 가뭄이 들 때 옛터가 보이는 곳에서 용궁 터를 내려다보며 살고 있다. 


07.jpg » 대청댐이 생기기 전 금강변은 모래가 풍성했다.


그 가운데에는 다행히 수몰은 면했지만, 마을을 둘러싸고 호수가 되어 오도 가도 못하는 마을이 있다. 육지 속에 섬 아닌 섬마을 중 하나가 옥천군 군북면 막지리(莫只里)이다. 


08.jpg » 육지 속의 섬마을 막지리 전경.


막(莫)은 원래 보리 맥(麥) 자에서 유래했다. 사람들은 이 마을을 맥기라고 부른다. 맥기는 맥계(麥溪)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강가 갯밭은 보리와 밀 농사가 주를 이루었다. 제방이 없던 강변은 홍수나 가뭄 등으로 수위 변화가 무쌍하기 때문에, 여름 홍수위 전에 타작하는 보리와 밀밖에 재배할 수 없었다. 강변에 모래밭을 따라 난 마을에 수해가 나면, 닭들이 지붕 위로 올라가기 일쑤였다. 물난리가 나면 강 한가운데 솔밭은 반듯하게 서 있는 소나무가 하나도 없었다. 강변이 금모래밭과 밀밭 보리밭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조선 시대 우암 송시열 선생은 이곳을 지나다가, 보리가 많은 것을 보고 맥계(麥溪)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것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발음 편한 대로 막지(莫只)로 고쳐 불렀다. 


09.jpg » 막지리 앞 강변 보리밭.


막지리로 가기 위해서는 소정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들어간다. 대청호가 생기기 전에도 강을 건너야만 들어갈 수 있는 마을이었다. 배는 마흔 명이 타는 큰 나룻배였는데, 주민이 많아 돌아가며 사공은 맡았다. 집집이 사공에게 보리나 쌀 한 말을 뱃삯으로 냈다. 가뭄 때에는 여울을 따라 걸어서도 건널 수 있었다. 호수가 된 지금도 옥천군에서 허가해준 배가 있지만, 도선을 이용하는 이는 거의 없다. 주민들도 연로해 점차 사람들이 줄고 있어 돌아가며 배를 운항할 사람도 없다. 사람 나이 먹듯, 마을도 늙어가고 있다. 연로한 마을 주민들은 배를 타려면 나루터까지 한참을 걸어 내려가야 한다. 특히 봄 가뭄이 심할 때, “강 끄트머리까지 가려면 다리 아프고 숨이 차서 못 가, 애들이나 오면 차나 타고 나가지 웬만하면 꼼짝도 안햐?” 하신다.


10.jpg » 막지리를 드나드는 도선.


자동차가 보급되면서 뱃길보다는 산길을 이용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해발 2백m 용촌 고갯길을 넘어 4㎞를 구불구불 들어와야 하는 임도는 그나마 고향 찾아 들어오는 자식들이 주로 이용하고 있다.


11.jpg » 막지리를 들어가는 임도 4㎞.


대청호로 인해 육지 속 섬마을이 되었지만, 정작 이들은 대청호 물을 식수로 사용하지 못한다. 대전 충남북 세종지역은 대청호 하류부에서 취수해 수돗물로 사용하고 있는데 말이다. 마을로 들어오는 도로도 없던 시절엔 땅 뚫을 장비도 들어오지 못했다. 그나마 임도가 난 후, 장비를 싣고 와 지하수를 끌어올릴 수 있었는데, 주전자가 허옇도록 석회수가 나왔다. 마을 분들의 표현대로 하면, '세수해도 뻑뻑하고, 머리 감아도 퍼등거렸다'. 따라서 먹는 물은 반드시 보리 물을 끓여 먹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오랫동안 마을 사람들이 쓰는 물은 따로 있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수를 산 중턱의 간이 정수시설을 이용하거나, 파이프에 대서 경로당 앞으로 내려오게 했다. 피브이시 파이프는 30여년이나 사용해 비가 오면 흙탕물이 흘러나오기 일쑤다. 파이프가 낡아 제구실을 못하지만, 그래도 이 물은 세수를 해도 매끄럽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경로당 샘터로 나와 빨래를 한다. 각자 집에서 지하수를 빼면 계량기가 돌아가 전기세를 내야 하니, 경로당 앞은 마을의 공동 빨래터인 셈이다. 


12.jpg » 산간 계곡수를 받아 빨래하는 마을회관 앞 공동 빨래터.


옛날에는 땅 중에서 제일 상답이 바로 막지리 마을이었다. 얼마나 좋은지, 한 길을 파도 돌멩이가 안 나올 정도로 흙이 새까맸다. 온갖 유기물질이 강변에 쌓이니 당연히 비옥한 땅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마늘 하면 맥기 마늘, 소 하면 맥기 소라고 할 정도였다. 옥천 장에 가면 맥기 것이 늘 최고였다. 옥천 일원 3개 면에서 나오는 보리가 막지리 것을 못 당했다. 옛날에는 물 찬 곳이 전부 보리밭이었는데, 막지 땅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토지가 좋다고 마을 사람들은 자찬했다. 다른 곳이 100평에 쌀을 한 가마니 하면 여기선 두 가마니나 거뒀다. 땅이 비옥하니 농사도 잘되었고, 돈도 꽤 많이 돌았다. 


13.jpg » 옥천군 금강 변의 산밭.


부자들이 많은 만큼 막지리 동네 사람들은 억셀 수밖에 없었다. 하도 농사 거리가 많아 새벽부터 밤까지 일해야 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다 보니, 부단히 경쟁해야 했고,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도 억세어서 타지 사람들은 막지 사람들을 물가 놈들이라 했다. 이렇게 돈도 돌고, 사람들도 많고, 억세고, 텃세도 심한 만큼, 살맛이 나는 아주 흥에 찬 마을이었다. 


14.jpg » 과거의 농경지는 개펄이 되어 멧돼지의 목욕 터가 되었다.


막지에서 태어나 막지에서 청년기를 보낸 강만호 씨는 풍물을 아주 잘하기로 유명한 분이다. 강씨가 스물다섯 살 되던 해에, 서울에서 온 분이 강씨가 쇠 치는 것을 보고는 서울로 가자고 권유했다. 강 씨의 표현대로라면, 댐이 만들어져 수몰되면서 막지리 사람들은 전국 뿔뿔이 흩어져서 풍물 장사를 했다 한다. 전국 팔도 텔레비전에 풍물 치는 사람 가운데 막지리 사람이 많이 나왔다. 당시만 해도 양반과 상놈 구분이 심해서, 풍물은 상놈이 하는 것이라 했다. 집에서는 서울로 풍물 하러 올라간다 하니 막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다 보니, 지금껏 농사나 짓고 산다고 했다. 강 씨는 지금도 옥천 영동 대전 등지에서 풍물을 가르친다. 한번은 김천에 징 꽹과리 놋그릇 만드는 공장에 불려간 적이 있었다. 전국에서 쇠 꽤나 친다는 사람들이 다 모였을 때, 강씨가 쇠를 치니 다들 깜짝 놀라더란다. 누구에게 전수받았냐고 묻기에 그냥 동네 내려오는 대로 치는 거라 하니, 그렇게 잘 치는데 왜 여태까지 인간문화재가 못됐냐고 하더란다. 강씨가 쇠를 치면 다른 사람이 장구를 치는데, 강 씨를 따라올 사람이 없더란다. 


02.jpg » 동네 분들에게 배워 쇠를 친 강만호 씨.


이 마을 사람이자, 사물놀이로 유명한 김덕수 씨는 옥천에서 서울로 올라가 풍물로 성공한 사례였다. 지금도 막지리에 김덕수 씨의 부친과 조부의 산소가 있지만, 당시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 등은 풍물로 충북 일대를 주름잡았다. 특히 김덕수 씨의 작은 아버지인 김봉학 옹은 옥천군에서 풍물을 제일 잘 치는 사람 중 하나였고, 김덕수의 아버지 김문학 옹은 남사당패에서 활동했다.


03.jpg » 사물놀이 명인 김덕수. 연합뉴스


막지리 풍물의 시작은 조상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가에 살다 보니, 마을은 배를 만들어야 했다. 배 하나 만들려면 굵은 통나무가 몇 그루씩 들어가고, 목수 몇 명이 매달려 한 달을 만들어야 했다. 배에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조금도 틈새가 뜨면 안 되는 아주 정밀한 작업이었다. 따라서 동네 경비로 품이 많이 드는 일을 하다 보니 자금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막지리는 이 자금을 걸립을 나가 충당했다. 걸립이란 동네 경비를 마련하고자 패를 짜 풍악을 쳐서 돈이나 곡식을 얻어오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장 치러 간다'고 한다. 장마당에 가면 씨름이나 팔씨름으로 상대 패들을 제압하지 못하면 그 장터를 들어가질 못했다. 그런데 예외 없이 막지리의 경우는 씨름하러 갈 때, 풍물이 같이 치고 들어갔다. 풍물이 먼저 치고 들어가면 “아~ 막지리에서 장 치러 왔구나! ”하고 알아봤다. 한마디로 풍물은 막지 사람이 세를 부리는데 한몫했다.


04.jpg » 막지리 이장 댁 거실에 걸려있는 과거 나룻배 사진.


강 건너 소정리와 막지리 중간에는 강 한가운데에 솔밭이 있었다. 막지리가 제일 살기 좋았던 때는 솔밭이 있을 때였다. 솔밭에서 갈퀴로 나무 땔감도 쉽게 구해왔다. 여름엔 자갈밭에서 놀다가 솔밭 한가운데 운동장에서 배구시합도 했다. 이 동네는 옥천군 내 배구대회를 할 때마다 1등은 떼 놓은 당상이었다. 단일 부락에서 1등 하는 곳은 막지리밖에 없었다. 당시만 해도 막지리엔 청년들이 백 명이 넘었다. 막지리는 딸이 귀해서, 낳았다 하면 아들인 것도 참 이상했다. 청년이 마흔 명이면 처녀가 한 명꼴이었다. 그래서 아들을 못 낳으면 막지리로 이사를 왔을 정도였다. 옥천 시내는 장이 안 섰어도 막지리 골목에선 장시가 섰을 만큼, 양반과 부자들이 많이 살아 늘 난전이 펼쳐졌다. 일제강점기에 강 건너 신작로를 냈는데, 그 길은 경상도에서 서울로 가는 큰길이었다. 경상도에서 올라와 막지리 앞길로 해서 청주, 천안, 서울로 올라가다 보니, 하도 사람이 많아서 배 두 개가 왔다 갔다 할 정도였다.


경상도에서 청주로 이어지는 이동로에 있는 막지리, 새하얀 모래밭이 4km나 넘는 농사짓기 비옥한 땅과 1만평의 넓은 소나무밭이 광장을 이뤄, 장시와 풍장이라는 문화를 형성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풍물이라는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된 것이었다.


05.jpg » 대청호가 생기기 전 막지리 마을. 옥천문화원 제공.


이제 '장 치러 간다'는 말은 부모와 조상의 이야기가 되었다. 강씨는 부모님들이 배구하는 것을 구경하고 응원이나 하던 세대이다. 흥과 힘이 결합해 만들어진 '장 치러 가는' 문화는 분명 옥천군 군북면 막지리 사람들에게 자부심으로 남았다. 비록 막지리 마을이 늙어가고 있지만, 대대손손 막지리 마을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풍물은 이제 옥천군 전체가 즐기는 문화가 되었다. 막지리 호숫가 보리밭 길을 따라가며 들을 수 있는 마을주민들의 신나는 꽹가리 소리에서, 지금 용궁 터가 된 막지리 솔밭의 씨름과 배구소리 그리고 풍장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최수경/ 금강생태문화연구소 ‘숨결’ 소장,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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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경 금강생태문화연구소 ‘숨결’ 소장, 이학박사
10년 넘게 시민들과 함께 `비단물결 금강천리 트레킹'을 운영하고 있는 환경교육자이자 생태해설가. 대전충남녹색연합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이메일 : tnrud49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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