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반야봉을 닮아가는 '지리산 호랑이' 함태식

윤주옥 2011.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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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서 38년 살았는데도 안 다닌 데가 더 많아"

10월24일 '함태식과 걷는 마지막 노고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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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매가 반야봉을 닮아가는 지리산 호랑이 함태식

 

지리산을 이야기할 때 떠오르는 사람들이 많다. 고운 최치원, 점필재 김종직, 남명 조식, 매천 황현, 모두 지리산 어느 골짜기에 큰 흔적을 남긴 분들이다. 그들과는 다른 측면에서 함태식(84)은 우리 시대 지리산을 상징하는 또 한 분의 어른이다.

 

내가 선생님을 가까이서 뵌 건, 2009년 2월 28일이었다. 그날 피아골대피소에서는 선생님의 38년 지리산 생활을 마무리하는 조촐한 모임이 있었고, 선생님은 서운함과 아쉬움 때문인지, 아니면 멍에를 벗어버린 시원함 때문인지 이미 거나하게 한잔 하신 상태였다. 피아골대피소 현관문에 기대어 가야금 병창을 듣던 선생님의 모습은 지금도 나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애처로왔다.

 

2009년 5월 4일, 선생님과 중산리에서 8시간 동안 걸어 천왕봉에 올랐다. 휘청대는 선생님의 다리를 보며, 더 이상은 안 되겠는데, 라고 생각할 때 ‘산은 소걸음으로 천천히 가는 거야.’라며 천왕봉을 향해 걸으셨다. 벌써 따가운 5월의 햇살을 받으며 올라가시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보며 여든이 넘었는데 정말 대단하다 싶었다.

 

선생님은 가끔 구례읍의 ‘지리산 사람들’ 사무실에 들르신다. 낮밥을 먹자 할 때도 있고, 빵을 들고 오실 때도 있다. 케이블카와 관련한 궁금증이 생기면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물어보신다.

 

지리산 하면 여전히 눈을 반짝이시지만, 선생님의 눈매는 더 이상 지리산 호랑이의 날카로운 그것이 아니라 반야봉처럼 부드러운, 맘씨 좋은 할아버지의 그것이다.

 

지리산과 반평생을 살아온 선생님이 지리산에서 아름답게 마무리하길, 지리산이 지켜지길 바라는 선생님의 소망이 꼭 이뤄지길 빈다.

 

글을 쓰기 위해 피아골과 구례읍내에서 선생님을 뵈었다. 선생님은 기억을 더듬어, 농을 섞어가며, 가림 없이 당신의 삶과 생각들을 말씀해 주셨다. 긴 시간, 대화를 나누어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선생님과의 대화는 편의상 평상어로 정리했다.


 

평생 실속 없이 부조리와 싸웠던 것 같아. 내가 말이야, 해방된 다음날 구례경찰서를 점령해 서장 노릇을 했어. 당시 18세였는데"

 

어린 시절은?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다 구례 사람이야. 10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지. 내 탯자리는 봉동리인데, 그 곳은 아버지가 상회를 하던 자리였어. 아버지는 머리가 비상하고 장사 수완도 좋아서 많은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땅을 사서 당시 삼천 석 집이었다고 해. 부자긴 했지만 인심을 잃진 않았어. 다른 부자들에 비해 소작료도 적게 받고, 해방 후에는 소작인들에게 땅을 나눠 줬거든. 지금 구례에는 나와 학교 교사로 한평생을 살아온 내 동생이 살고 있어. 넷은 하늘로 갔고, 나머지 형제들은 아버지 제사 때면 모두 모이지.

 

학창시절, 반항아였었나요? 구례중앙초등학교와 5년제 순천중학교를 졸업한 후 연희전문학교 이과에 들어갔어. 졸업은 못했지. 당시 전국적으로 서울종합대학 반대운동(국대안 파동)이 있었는데, 그 일에 내가 앞장섰거든. 학창시절 나는 의협심이 많았어. 중학교 때는 항일 때문에 일본인들에게 많이 맞았고, 생각해 보면 평생 실속 없이 부조리와 싸웠던 것 같아. 내가 말이야, 해방된 다음날 구례경찰서를 점령해 서장 노릇을 했었어. 당시 18세였는데, 믿어지지 않지? 그 난리 중에도 일본인들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줬어. 사람들이 잘 따라준 덕분이지.

 

한국전쟁 전후 무얼 하셨는지요? 우리 가족은 해방 후 서울로 올라갔지. 마포에 살았는데, 우리집 별칭이 ‘마포 전라도 부잣집’이었어. 다시 구례로 내려오게 된 것은 전쟁 때문이야. 23살 때 전쟁이 났는데, 신체검사에서 갑종합격을 받고 바로 부산으로 갔어. 징병기피 도망, 당시는 나 같은 청년이 부지기수였어. 부산에서 거지처럼 생활했는데, 그때 아내를 만난 거야. 서울에서 피난 온 아가씨였는데, 최인애라고. 사랑했냐고? 당연하지. 아내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현모양처였어. 80살이 되도록 인천합창단에서 활동할 정도로 노래도 잘 하고. 산에서 살았으니 가정을 돌보지는 못 했겠다는 말은 마. 노고단 산장에 있을 때는 장사가 잘 되어 생활비며 학비며 모두 보냈다고.

 

도벌꾼들이 지리산으로 몰려들어 대규모 불법적 산림도벌을 공공연히 자행했거든. 골짜기는 말할 것도 없고, 해발 1,500m 이상 연하천, 칠선계곡 막바지 완사면, 해발 1,700m 장터목 고산지대에 이르기까지 군용차 엔진을 떼어다가 원형톱날을 걸어 제재소를 차려놓고 도벌했을 정도였으니까"


전쟁 후 인천에 있던 조선기계제작소에 다녔고, 그때 혼인도 하고, 아이도 낳고 그렇게 살았지. 그러다가 1960년 4월 아버지가 ‘6․25가 또 날 것 같으니 빨리 내려와라.’하여 구례로 내려왔어. 한 명은 손잡아 걸리고, 한 명은 업고, 또 한 명은 배 안에 있었는데 걸어서 구례까지 내려왔지. 그때 아버지가 말씀하신 6․25가 또 날 것 같다는 것이 바로 5․16 군사 쿠데타였어. 앞을 내다보신 거지.

 

한국전쟁 후 서울과 구례를 오르내리며 ‘구례 연하반(求禮 烟霞伴)’(이하 연하반) 활동을 했지. 연하반은 1955년 5월 5일 만들어진 단체야. 연하는 산수 즉 자연을, 반은 짝을 뜻하니, 연하반은 자연과 짝을 이루는 사람들이란 말인데, 이렇게 아름다운 이름, 아무 곳에도 없을 거야.

 

연하반은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는데 앞장섰고, 지리산국립공원 지정 후에는 산장을 만드는 역할도 했어. 연하반은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1967년 12월 29일을 기념하여 이름을 ‘지리산악회’로 바꿨어. 지리산으로 들어간 건, 1971년 노고단산장이 지어지고, 1972년 노고단산장 관리인을 시작하면서 부터야. 아내에게 산에 들어가 함께 살자고 했지만 아이들 때문에 안 된다 하여 혼자 산으로 들어가게 된 거야.

 

한국전쟁 전후 지리산의 상황은? 지리산은 땅이 좋아 적송, 전나무, 가문비나무, 구상나무 등 좋은 나무들이 많았어. 풍부한 원시림이었지. 그땐 불안한 시대였잖아, 혼란의 시대였지. 지리산도 마찬가지였어. 도벌꾼들이 지리산으로 몰려들어 대규모 불법적 산림도벌을 공공연히 자행했거든. 골짜기는 말할 것도 없고, 해발 1,500m 이상 연하천, 칠선계곡 막바지 완사면, 해발 1,700m 장터목 고산지대에 이르기까지 군용차 엔진을 떼어다가 원형톱날을 걸어 제재소를 차려놓고 도벌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때는 이러한 참상을 고발해도 단속을 못하는, 속수무책 무법천지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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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태식 선생님과 둘째 아들 (사진 제공=함태식)

 

38년간의 산 생활,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지리산 자락, 구례에서 나고 자랐지.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후 노고단에 가 보니 준비 없이 산에 온 사람들이 많은 거야.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산장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노고단, 세석, 장터목 등에 산장이 세워졌는데,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니 없는 것만 못한 상황이었어. 누군가 책임지고 관리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지리산악회가 산장 관리를 맡게 되었고, 지리산악회에서 나를 산장관리인으로 추천했어. 그렇게 산 생활이 시작된 거야.

 

노고단산장을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직영한다 하여 1988년 1월 4일 피아골대피소로 옮겼어. 노고단산장에서도, 피아골대피소에서도 공단에 임대료를 냈지. 2009년 4월 25일 산에서 내려왔으니 38년을 지리산에서 산거야. 산에서 혼자 밥해 먹고, 외로우면 술 마셨지. 술은 중학교 때 호기심으로 시작했는데 산에 있으면서 무지하게 마셨어. 아마 남한에서 제일 많이 마셨을 걸. 이젠 안 마실거야.

 

산 생활, 좋았지. 어려운 거 없었어. 매일매일 산을 탔어. 지리산 어디가 가장 기억 나냐고? 전부 다. 그렇게 산을 다녔는데도 안 다닌 곳이 더 많아. 지리산이 그렇게 큰 산이야. 산 덕분에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났지. 이돈명 변호사, 법정 스님과는 친하게 지낸 사이야.

   

지금은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피아골에 있으니 지금도 지리산에 있는 거지. 산에서와 마찬가지로 혼자서 밥 해먹고, 사람들 오면 지리산에 대해 얘기하고, 편하게 잘 지내고 있어. 내가 요리는 잘 하거든, 40년 동안 직접 해 먹었으니까. 특히 해물탕을 잘 해. 나는 먹는 걸 밝히는 편은 아냐. 요즘은 장어를 잘 먹어, 고기는 이가 좋지 않아 못 먹고.

 

산에서 살았던 날들, 후회하지 않아. 팔자지 뭐. 산에서 내려오던 날, 서운하진 않았어. 그때 내려오기 두려웠던 건, 내려오면 오갈 때가 없잖아. 다행히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있을 곳과 할 일을 만들어 주니 감사하지. 산에서 내려오길 잘 했어. 퇴계는 유산여독서(遊山如讀書)라 했어. ‘산에서 노는 것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는 말인데, 산에서 논다는 게 뭐겠어? 산에 오르는 거잖아. 지리산만이 아니라 모든 산에 애정이 가. 우리나라 산은 모두 좋은 산이야. 그러니까 잘 보호해야지.

 

글·사진/ 윤주옥 한겨레 물바람숲 필진,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사무처장

 

* 이 글은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소식지 '초록숨소리' 2011년 봄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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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기사: 함 선생님, 오래오래 건강하시어 지리산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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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옥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사무처장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사무처장. 현장 감시와 정책 개발을 통한 국립공원의 대표적 파수꾼이다. 현재 전남 구례에 거주하며 지리산과 섬진강 일대의 자연을 섬세한 감성으로 그려낸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windjuok@hanmail.net      
블로그 : http://plug.hani.co.kr/windjiri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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