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밀림 누빈 그때 그 한국호랑이

조홍섭 2008. 10. 17
조회수 28082 추천수 0

[환경 독서] 동화책 <위대한 왕>

 

러시아인이 체험·관찰로 꾸민 동물문학 백미

사람·자연을 호랑이 눈으로…다큐멘터리 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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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동물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원전이 아니라 주로 아동용으로 축약해 그림을 곁들인 동화책이었지만 몇 번이고 읽어도 지겹지가 않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시이튼 동물기>와 제목이 기억나지 않지만 만주 산림의 거대한 한국호랑이 이야기였다.

 

얼마 전 우연히 <위대한 왕>(아모르문디, 2007)이란 책을 발견했다. ‘만주의 밀림을 호령한 한국호랑이의 일생’이란 부제목과 니콜라이 바이코프란 저자 이름에서 어릴 적 그토록 좋아했던 이야기임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어릴 적 본 바로 그 책…<만주일일신문> 연재 뒤 1936년 출간

 

저자는 1902년 만주 동청(東淸) 철도의 수비대로 파견된 제정 러시아의 장교였다. 그 후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해 그곳 자연 속에 묻혀 지냈다. 그가 <만주일일신문>에 일본어로 번역해 연재한 뒤 1936년 단행본으로 출간한 <위대한 왕>은 만주의 원시림 지대에서 직접 체험하고 관찰한 동식물과, 원주민이나 사냥꾼과 만나 들은 이야기로 꾸민 동물문학의 백미이다.

 

책을 펼치자 재일조선인 2세로 ‘디아스포라’(민족 이산)라는 말을 익숙하게 만든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의 서문이 눈길을 붙잡는다. 그도 역시 아동문고에서 이 책을 처음 접했다. ‘위대한 왕’의 아버지가 백두산에 살던 조선 호랑이였다는 사실이 어린 재일조선인을 매료시켰다. “‘조선’이라는 말에 경멸과 조롱의 울림이 진드기처럼 늘 들러붙어 다니던 일본에서, 비록 ‘조선호랑이’의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이 말이 경의의 뜻으로 쓰이는 사례를 접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선호랑이가 얼마나 강한지 자랑하다 사자가 더 세다고 우기는 일본인 급우와 주먹다짐을 벌이기도 했다.

 

서 교수처럼 바이코프도 전쟁과 혁명 시대에 조국을 잃은 디아스포라다. 바이코프가 국가에 절망해 자연에 눈을 돌린 것이나, 자연과 인간을 호랑이의 시선으로 보게 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왕’이 태어난 곳은 만주 동북부, 러시아와의 국경지대 숲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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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한국호랑이의 새끼를 밴 암 호랑이를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왕이 탄생하는 것이다.

 

“새끼들이 세상에 나올 날이 가까워오자 암호랑이는 점점 더 은신처를 떠나는 횟수가 적어졌고, 사냥 반경도 좁아졌다. 움직임도 좀 더 조심스러워졌다. 걸을 때는 뒷다리 사이를 더 많이 벌렸다.”

 

마치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듯 호랑이의 움직임을 자세하게 그렸다. 이런 관찰은 아마도 그가 자주 만난 사냥꾼에게서 얻은 것 같다. 호랑이를 쫓는 사냥꾼은 호랑이처럼 보아야만 한다. 그래서 호랑이를 추격하면서 그는 호랑이를 존경하게 된다.

 

‘왕’이 태어난 곳은 만주 동북부, 러시아와의 국경지대이다. 이곳을 주민들은 ‘슈하이’ 곧, 숲의 바다로 부른다. 울창한 타이가 삼림지대가 펼쳐진 곳이다. 바이코프는 이 삼림을 “마치 높은 파도가 이는 거친 바다가 순식간에 굳어버린 것 같았다”고 묘사했다.

 

왕은 수다쟁이 까치와 멧돼지, 곰, 인간 등을 만나면서 점차 거대한 수컷 호랑이로 자라난다. 그의 이마엔 왕(王) 자가, 목덜미엔 대(大) 자 줄무늬가 선명하다.

 

타이가의 원주민들은 이 거대한 호랑이를 기려 여러 고개에 신당을 세워 신으로 떠받들었다. 왕은 “먹이로서의 인간에게는 관심이 없었고, 적으로서는 무시했다.

 

전 세계 6가지 아종 중 가장 커 무게 370㎏, 길이 3m까지

 

이 책의 주인공은 ‘만주호랑이’이다. 그러나 이 호랑이를 부르는 이름은 가지가지다. 시베리아호랑이, 아무르호랑이, 한국호랑이, 백두산호랑이 등은 모두  같은 호랑이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한국에선 한국 또는 백두산호랑이라고 부르길 좋아하고, 중국은 만주호랑이, 러시아는 시베리아호랑이로 부르자고 한다. 세계자연보호연맹(IUCN) 같은 국제기구는 민족적 편향을 피해 지명을 딴 아무르호랑이라고 주로 표기한다. 전 세계엔 호랑이의 6가지 아종이 살고 있고 이 가운데 아무르호랑이가 무게 370㎏, 길이 3m까지 자라 가장 크다.

 

어쨌든 이 호랑이의 주 서식지는 한반도, 만주 동북부, 극동 시베리아였다. 현재 약 400마리의 야생 아무르호랑이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극동 시베리아의 아무르-우수리 지방 즉 프리모르스키, 하바롭스키 크라이 등에 서식한다. 중국과 북한에는 극소수밖에 없고, 남한에선 1922년 마지막 호랑이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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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으로 최면 걸어 사냥…어떤 동물의 소리도 능숙하게 흉내

 

책으로 돌아가면, 동아시아 사람들은 이 특별한 동물에 대해 오래전부터 경외감을 느꼈고,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으로 상대방을 최면에 빠뜨린다고 믿었다. 그는 사람뿐 아니라 사슴, 노루, 개, 심지어 곰까지도 이런 최면상태에 빠져 호랑이의 먹이가 된다고 적고 있다. 사냥꾼의 믿거나말거나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누가 알랴, 실제로 호랑이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어떤 과학자도 호랑이의 ‘최면 사냥법’을 연구한 적은 없다.

 

바이코프는 호랑이가 어떤 동물의 소리도 능숙하게 흉내낼 수 있으며, 이를 이용해 사냥한다고 적고 있다. 번식기 암컷 곰의 목소리를 흉내내 수컷 곰을 사냥하는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나중에 호랑이였음을 발견한 곰이 나무 위로 피신한 모습이 바로 옆에서 보듯 생생하다.

 

“곰은 이 눈빛에 소름이 돋고 목덜미의 털이 곤두섰다. 곰은 주둥이를 내밀고 두꺼운 입술을 오므린 채 반항을 표시했다. 또 으르렁거리며 콧바람 소리를 내고 몸을 부르르 털고 침을 뱉으며 온갖 방법으로 두려움을 떨치려 했다. 하지만 호랑이가 뒷발로 일어서서 발톱으로 참나무 줄기를 긁기 시작하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마른 잔가지를 부러뜨려 왕에게 마구 떨어뜨렸다.”

 

시베리아호랑이가 반달가슴곰의 목소리로 유인해 사냥하는 기술에 대해서는 과학자들도 그런 사례가 실제로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토벌대 함정에 빠진 아내 구하러 나섰다 결국 총 맞아

 

그러나 숲의 바다는 러시아와 일본의 만주 침공으로 훼손되기 시작한다. 철도가 건설되고 숲이 벌채됐다. 사람들도 몰려들었다. 숲을 불태우고 파괴하는 인간들에 대해 왕은 “잠재울 수 없는 분노와 복수심이 차올랐다.” 왕은 벌목꾼과 병사들을 공격해 죽인 뒤 잡아먹는다.

 

그러나 한 명의 예외가 있었으니 늙은 모피사냥꾼 퉁리였다. 그는 자연에 대한 오랜 지혜를 통해 숲을 망가뜨리는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고 자연의 화신으로서 왕을 존경한다. 왕도 그에게 범접할 수 없는 외경심을 느낀다. 자연과 인간은 이렇게 표면적으로 적대적인 관계 속에서 진정한 만남을 이룬다.

 

잇단 호환에 마침내 호랑이 토벌대가 조직된다. 왕의 배우자인 암 호랑이가 함정에 빠지고 왕은 위험을 무릅쓰고 아내를 구하러 나선다. 마치 <시이튼 동물기>에서 이리왕 로보가 아내 블랑카를 구하기 위해 나선 것처럼. 그리고 로보와 마찬가지로 왕은 사냥꾼의 총에 맞는다. 높은 산 정상에서 최후를 맞는 왕에게 퉁리가 조용히 찾아온다. 그는 위대한 왕이 다시 깨어나기를 기도한다.

 

조홍섭 한겨레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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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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