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기가 거대고래 출현 불렀다

조홍섭 2017. 05. 24
조회수 13182 추천수 0
300만년 전 빙하 확장과 용승류 체계 확립돼 먹이 크릴 번성
낮은 대사율, 장거리 이동에 유리…기후변화는 서식지 축소 위협

ba1.jpg » 지구 역사상 최대 동물인 대왕고래가 크릴 떼를 크게 삼키고 있다. 한 번에 바닷물과 크릴 90t을 삼킬 수 있다. Silverback Films, BBC

우리는 현재의 지구가 지질학적인 시간으로 보아도 얼마나 특별한 곳인지 모르기 쉽다. 세계에서 가장 큰 포유류인 대왕고래(흰긴수염고래)는 지구에 여태까지 살았던 모든 동물 가운데 가장 크다. 길이 30m에 무게는 지상 최대 공룡인 아르헨티노사우루스의 곱절인 170t에 이른다. 혀 무게만 2.7t이고 입을 크게 벌려 90t의 물과 먹이를 한입에 삼킨다. 가장 큰 동물이면서 새우 크기의 크릴만 먹어 목구멍은 농구공보다 큰 물체는 삼키지도 못할 만큼 작다.

ba2.jpg » 대왕고래와 사람의 크기 비교.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처럼 극단적으로 큰 동물이 언제 어떻게 지구에 출현하게 됐는지는 화석 기록이 충분치 못하기 때문에 학계의 오랜 수수께끼였다. 거대한 상어가 출현한 뒤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거대화했다는 등 여러 가설이 나왔을 뿐이다.

세계에서 수염고래류 화석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미국 스미스소니언 국립 자연사박물관 연구자 등 미국 과학자들이 이 수수께끼를 풀 유력한 새로운 가설을 내놨다. 약 300만년 전 지구에 빙하기와 함께 바다 환경이 바뀌면서 수염고래의 거대화가 급작스레 이뤄졌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런 내용을 과학저널 <왕립학회보 비(B)> 24일 치에 실린 논문에서 밝혔다.

연구자들은 고래 두개골의 폭이 고래 몸집의 크기를 나타내는 지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화석 부족을 극복했다. 몸길이를 추정할 수 있는 전체 골격 화석이 없어도 두개골 화석만 있으면 길이 추정이 가능해진 것이다.

ba4.jpg » 대왕고래의 머리 모습. 고래의 두개골은 덩치를 짐작하는 지표가 된다. Nicholas Pyenson

연구자들은 멸종한 63종과 현재 생존한 13종의 수염고래를 대상으로 화석 기록과 유전자를 통한 계통분류학 연구를 했다. 이를 통해 지난 3000만년 동안 수염고래류의 크기가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를 밝혔다. 

놀랍게도 몸길이 10m 이상의 거대화는 지질학적으로 최근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다. 고래의 역사를 통틀어서 요즘처럼 고래가 컸던 적은 없었다. 연구자들은 논문에서 "우리는 거인의 시대에 살고 있다"라고 적었다. "지질학 역사에서 현대의 바다처럼 극도로 큰 몸집의 여과 섭식 동물이 매우 밀도가 높은, 그러나 산발적으로 분포하는 먹이 자원에 기대어 살아간 적은 없었다.”

논문의 주 저자인 그레이엄 슬레이터 미국 시카고대 진화생물학자는 "우리는 고래가 우연히 오랜 시간에 걸쳐 차츰 커져서 오늘날 보는 것처럼 거대한 동물이 된 것처럼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 데이터는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수염고래가 거대화한 이유를 설명하는 유일한 길은 가까운 과거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고 그것이 거대화한 쪽에는 이익을, 작은 쪽에는 불이익을 주었는지 밝히는 것입니다."라고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그렇다면 고래가 거대화할 즈음 지구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변화는 약 450만년 전 시작돼 300만년 전에는 분명해졌다. 수염고래의 길이가 10m 이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몸집이 작은 고래들이 사라졌다. 한 종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계통에서 이런 현상이 동시에 일어났다. 

연구자들은 이런 변화가 바다와 1차 생산의 변화에 기인한다고 밝혔다. 당시는 지구에 빙하기가 시작됐을 때였다. 바닷물 수온이 떨어지면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덩치가 커진 것은 아니었다.

연구자들은 마이오세 후기(약 500만년 전)부터 해안의 생산성이 높아졌음에 주목했다. 빙하와 만년설이 육지를 덮자 여름에 이들이 녹은 물이 풍부한 영양물질을 연안에 쏟아부었다. 플랑크톤이 번성했고 이를 먹는 크릴 같은 소형 갑각류도 대발생했다.

ba3.jpg » 거대한 수염고래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크릴이 폭발적으로 번성할 환경이 필요하다. 기후변화는 그럴 조건을 없앨 것이다. Silverback Films_BBC3

또 열대지방에 형성된 용승류도 큰 변화를 일으켰다. 극지방에서 해류를 타고 온 찬 바닷물이 바다 표면으로 솟아오르는 용승 시스템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연구자들은 “과거에 열대바다는 늘 엘니뇨 상태였다”라고 밝혔다.

이런 바다 환경변화는 수염고래가 거대화할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대형 포유류가 바다 표면의 소형 갑각류 무리를 걸러 먹고 살려면 먹이의 양도 많아야 하지만 무엇보다 밀도가 높아야 한다. 극지의 여름에 벌어진 부영양화의 크릴의 폭발적 번창은 그런 조건에 걸맞다. 

수염고래는 덩치를 키움으로써 먹이가 부족한 시기에 대사율을 낮추고, 장거리를 적은 에너지를 쓰고 이동할 수 있으며, 일시적으로 제공되는 풍부한 먹이와 오랜 금식 기간을 버틸 수 있게 됐다.

대왕고래는 최근의 환경변화를 놓치지 않는 뛰어난 적응 능력을 보였지만 19세기 말부터 인류의 포경산업으로 거의 절멸의 위협에 놓였다. 최근 포경 금지로 개체수가 회복되고 있지만 다시 새로운 환경변화에 직면했다.

기후변화가 그것이다. 연구자들은 “예상되는 지구온난화가 해양생태계의 구조와 다양성, 생산성에 끼칠 변화는 불길하다. 대형 수염고래의 핵심 서식지는 줄어들 것이다. 생태적으로 취약한 거인들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있다.”라고 논문에서 경고했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Slater GJ, Goldbogen J, Pyenson ND. 2017 Independent evolution of baleen whale gigantism linked to Plio-Pleistocene ocean dynamics. Proc. R. Soc. B
284: 20170546. http://dx.doi.org/10.1098/rspb.2017.0546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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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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