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삼의 힘, 빙하기 견디며 DNA 2배 된 덕분

오철우 2018. 06. 18
조회수 1206 추천수 0
유전체로 본 인삼 생태와 기원

음지 성장하며 월동…생육 독특
약리작용 물질 만들어 뿌리 저장

36억 염기쌍에 유전자 5만9천종
고려인삼, 원산종보다 게놈 2배

빙하기 때 ‘종 합성’으로 불어나
덕분에 추위 강한 생명력 확보

100만년 전 북미대륙으로 퍼져
‘우장춘의 종 합성론’ 새 주목



i1.jpg » 고려인삼연합회 제공, http://www.ekga.org

인삼을 인삼답게 하는 성분인 ‘인삼 사포닌’의 효능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각지의 인삼속 식물들에서, 고려인삼은 어떤 진화의 계보를 걸어왔을까? 30억 염기쌍의 인간 유전체보다 큰 규모인 고려인삼의 유전체(게놈) 염기서열이 최근 해독됐다. 고려인삼과 다른 인삼속 식물들의 유전체를 비교한 분석결과는 고려인삼 유전자의 특징과 역사를 얼핏 보여준다.

“인삼은 월동기엔 잎과 줄기를 모두 없애고 뿌리만으로 생존하다가 봄엔 다시 제 나이에 따라 다르게 줄기와 잎을 내며 성장하죠. 2년생이 1년생과 다르고 3년생이 또 다르고. 인삼 사포닌의 성분도 이전에 만들어둔 것을 바탕으로 새롭게 만들어내죠. 100년근이 있다면 그 성분은 100년 세월이 만든 겁니다. 인삼은 한 세대 안에 독특한 ‘진화’를 보여주는 식물인 거죠.” 오랜 인삼 연구자인 양덕춘 경희대 교수(한방재료가공학과)가 말하는 ‘진화’는 해마다 다른 변화를 축적해가는 인삼의 고유한 생육을 뜻하는 듯하다.

수천 년 동안 약용 식물로 쓰여온 인삼의 유전체(게놈) 염기서열이 거의 모두 해독되어 발표됐다. 양태진 서울대 농생명과학대 교수와 김남훈 박사, 인도 출신 무루카르틱 자야코디 박사 등 연구진 44명은 고려인삼의 유전체를 모두 해독하고서 다른 인삼속 식물들의 유전체와 비교해, 그 결과를 국제학술지 '식물 생명공학 저널' 등에 최근 발표했다. 덕분에 인삼의 생태와 기원, 이동의 역사가 유전체 분석을 통해 새롭게 조명됐다.

i2.jpg » 실선 원은 인삼속의 현재 분포, 점선 원은 과거에 분포했으리라 추정되는 지역. 600만~700만 년 전쯤에 2배체 인삼이, 그리고 100만 년 전쯤에 4배체 인삼이 북미대륙으로 건너갔을 것으로 유전체 비교분석에서 나타났다.

220만년전 ‘종 합성’ 유전체 2배로

인삼 유전체 해독은 10년 걸린 작업이었다고 한다. 생육이 길고 까다로워 분석에 쓸 안정적인 식물체를 선별하기 어려운 데다 유전체 규모도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이번 분석으로 고려인삼의 유전체인 36억 염기쌍과 5만9352개 유전자가 해독했다. 연구진은 이어 인삼속의 다른 식물들과 유전체를 비교해, 고려인삼의 유전자 특징과 진화 계통을 추적했다. 36억 염기쌍을 염색체별로 모두 다 배열하기까지는 작업이 좀 더 필요하지만, 현재 수준에서도 유전체 분석 결과는 고려인삼에 관해 잘 몰랐던 여러 사실을 보여주었다.

i3.jpg » 인삼 연생에 따른 변화. 왼쪽부터 1년근, 2년근, 3년근, 4년근, 5년근 6년근. 고려인삼연합회 제공.

무엇보다 고려인삼과 미국인삼(화기삼)이 중국 운남성, 베트남 북부, 히말라야에 사는 인삼속 식물들보다 훨씬 나중에 생겨나 진화했을 가능성이 유전체 구조에서 확인됐다. 고려인삼과 화기삼은 염색체를 12쌍(2배체) 지닌 히말라야 등지의 인삼속 식물들과 달리 그 2배인 24쌍(4배체) 염색체를 지니는데, 이런 특징이 이번 유전체 분석에서 자세히 다뤄졌다.

“식물에선 ‘종 합성’이 종종 일어납니다. 수정이 불가능한 다른 종간에도 가까운 종끼리 합해져 새로운 종이 생겨나죠. 동물과는 다른 식물의 독특한 진화 동력이지요. 종 합성이 일어나면 두 식물 종의 염색체가 통째로 합쳐져 염색체는 배수가 됩니다. 이걸 배수체화라고 합니다.” 양태진 교수는 “고려인삼이 바로 그런 경우”라고 설명했다. 당연히 자연 산삼도 염색체 24쌍인 4배체다.

고려인삼이 4배체인 것은 어떤 의미일까? 덕분에 고려인삼은 더 많고 다양한 유전자 자원을 얻었을 것으로 연구진은 해석했다. 고산지대의 서늘한 음지에서 자라지만 추위엔 약한 히말라야 등지의 2배체 인삼속 식물과 달리, 4배체는 추위를 견디게 하는 월동 유전자들도 갖추어 한반도와 동북아 등지에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언제 이런 4배체 인삼이 출현했을까? 양태진 교수는 “유전체들을 서로 비교하며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4배체 인삼은 대략 220만 년 전에 등장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빙하기와 간빙기가 반복되던 시기에 4배체가 출현하면서 새로운 환경적응력을 갖추어 한반도를 비롯해 동북아에 살아남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북미대륙에 사는 미국인삼(화기삼)도 4배체 인삼인 것으로 나타났다. 북미대륙엔 현재 2배체와 4배체의 인삼속 식물이 모두 산다. 연구진은 두 차례에 걸쳐 인삼속 식물의 대륙이동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유전체를 비교해보면, 4배체 인삼이 출현하기 훨씬 전인 600만~700만 년 전쯤에 본래의 2배체 인삼속 식물이 먼저 북미대륙으로 건너가 ‘삼엽삼’으로 정착했고, 동북아에서 출현한 4배체는 100만 년 전쯤 건너가 ‘화기삼’이 된 것으로 분석된다는 것이다.

‘진세노사이드’ 생합성 원리에 주목

국내에선 인삼 연구가 일찍 시작됐다. 1978년 한국인삼연초연구소가 설립돼 인삼 연구의 중심이 됐다. 1998년엔 인삼 게놈 프로젝트(5개년)가 시행되면서 유전자 연구가 본격화했다. 당시 인삼 게놈 프로젝트를 이끈 양덕춘 경희대 교수는 “갖가지 환경과 품종에 따라 발현되는 유전자 염기서열 2만여 점을 수집해 이후의 여러 연구에 기초가 됐다”고 말했다. 이번에 공개된 인삼 유전체 데이터베이스는 인삼유전학에 새로운 기반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i4.jpg » 인삼의 부위별 명칭. 고려인삼연합회 제공.

인삼유전학 연구는 인삼 고유의 약리물질인 인삼 사포닌, 즉 진세노사이드를 중심으로 이뤄져 왔다. 진세노사이드가 어떻게 합성되며, 인삼 부위별로 함량과 성분이 어떻게, 왜 다른지, 새로운 성분을 합성하는 방법을 어떻게 찾을지 등의 물음이 연구 초점이 됐다. 진세노사이드의 생합성 과정을 연구해온 김유진 경희대 연구교수(생명과학대학)는 “지금까지 인삼속 식물들에서 최소 150종의 진세노사이드가 발굴됐고 고려인삼에선 홍삼을 포함해 40여 종이 알려졌다”면서 “진세노사이드의 생합성 과정이 아직 다 밝혀지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이번 유전체 분석에서는 진세노사이드가 잎에서 합성돼 뿌리로 이동해 저장된다는 점이 다시 확인됐다. 진세노사이드 합성에 관여하는 후보 유전자 100여 종을 찾아냈으며, 그것이 발현되는 곳을 확인해보니 주로 잎 부위라는 것이 확인됐다. 진세노사이드는 인삼이 어릴 적엔 잎에 더 많다가 나이가 들수록 뿌리에 많이 축적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공처리를 통해 새로운 성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양덕춘 교수는 “열 처리, 발효 처리, 산 처리를 하면 진세노사이드의 화학구조를 조금씩 바꿔 새 성분을 만들 수 있어, 홍삼 가공 같은 분야의 연구도 활발하다”고 전했다.

인삼 연구하다 만난 ‘우장춘 이론’

흥미로운 점은 인삼 유전체 연구자들이 10년 동안 유전체를 들여다보면서 뜻밖에 80여 년 전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1898~1959)가 발표한 ‘종 합성’ 학설을 유전체 수준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서울대와 농촌진흥청 연구진은 같은 배추속 다른 종끼리 합성해 새로운 종이 자연에서 만들어진다는 ‘우장춘의 종 합성’ 이론(‘우의 삼각형’ 이론)의 사례를 유전체 분석에서 확인해 과학저널 <사이언티픽 리포츠>에 최근 발표했다. 즉 ‘배추 + 양배추 = 유채’, ‘양배추 + 흑겨자 = 에티오피아 겨자’, ‘흑겨자 + 배추 = 갓’처럼 2배체 식물들이 합해질 때 4배체 식물인 유채, 에티오피아 겨자, 갓이 생겨난다는 것을 우장춘 박사가 염색체 관찰과 육종으로 입증했는데, 유전체 연구자들은 염기서열 비교 분석으로 이를 입증했다.

종 합성 이론에 의하면, 고려인삼의 출현은 2배체 식물 2종이 우연히 종간교잡해 4배체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살아남음으로써 가능했던 식물 진화의 사건으로 해석된다. 양태진 교수는 “적어도 식물 진화에선 종의 분화 외에 종의 합성도 중요한 요인임이 유전체 비교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며 “식물의 진화와 육종학자로서 우장춘의 업적이 다시 조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철우 선임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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