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벚꽃 원조’ 논란 끝? 제주 왕벚나무 ‘탄생의 비밀’ 확인

조홍섭 2018. 09. 14
조회수 7622 추천수 0
국립수목원 제주·일 왕벚나무 게놈 분석 결과 “유전적 교류 없었다”
제주 왕벚나무는 올벚나무와 벚나무 1세대 잡종으로 탄생 확인

1.jpg » 천연기념물 159호인 제주시 봉개동 왕벚나무 자생지의 2호목과 꽃, 열매(삽입). 국립수목원 제공.

프랑스인 신부 타케가 제주도에서 왕벚나무를 발견한 것은 일본강점기 직전인 1908년이었다. 반세기가 지난 1962년 식물학자인 박만규 국립과학관장은 “벚꽃은 우리 꽃-한라산이 원산지”란 주장을 폈고, 실제로 한라산에서 우리나라 연구자로서는 처음으로 왕벚나무 자생지를 확인했다. 이로부터 벚나무의 ‘제주 원산지론’은 국민적 상식이 됐다. 

벚나무는 일제히 피우는 화려한 꽃과 아름다운 나무꼴 덕분에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로수와 공원수로 인기가 높다. 그러나 여의도 윤중제나 진해의 벚나무를 비롯해 전국에 심은 벚나무 대부분은 일본산 왕벚나무였는데, 제주 왕벚나무가 그 원조라는 주장이 그런 찜찜함을 가시게 해 주었다.

박만규2.jpg » 한라산에서의 자생 왕벚나무 탐사를 앞두고 박만규 국립과학관장이 <동아일보>에 한국이 벚나무의 기원임을 주장하는 글을 실었다. 네이버 기사 라이브러리 제공.

한국 원조론에 맞서 일본에서도 일본산 벚나무의 야생 원종을 찾아 전국을 뒤졌지만 실패했다. 일본 왕벚나무는 1700년대 도쿄 근처에서 자생종인 올벚나무와 오오시마벚나무를 인위적으로 교배해 만든 품종임이 밝혀졌다. 한국과 일본의 왕벚나무가 형태상으로 비슷하고 일본에서 못 찾은 자생지가 한라산에 있다면, 제주의 왕벚나무는 세계로 퍼진 일본 왕벚나무의 원조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런 ‘상식’은 과학적으로 뒷받침되지 않았다. 한라산 왕벚나무가 어디서 기원했는지, 두 왕벚나무가 과연 같은지 유전적으로 밝히는 연구가 본격화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김승철 성균관대 생명과학과 교수팀은 2014년 ‘미국 식물학회지’에 실린 논문에서 제주 왕벚나무가 자생하는 올벚나무를 모계로, 벚나무(또는 산벚나무)를 부계로 자연적으로 형성된 잡종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왕벚나무의 일부 유전자와 엽록체 분석을 통해 이런 결론을 얻었지만, 일본 왕벚나무에 대한 연구는 후속 과제로 남겼다(▶관련 기사: 때 되면 한-일 원산지 논쟁, 벚꽃에게 물어봐!). 

국립수목원의 지원 아래 명지대·가천대 연구자가 참여해 왕벚나무의 전체 유전체(게놈)를 해독한 연구결과가 과학저널 ‘게놈 바이올로지’ 9월호에 실렸다. 이 연구에서는 제주의 왕벚나무와 인접 종은 물론 일본에서 최초로 왕벚나무가 기록된 도쿄대 부속 식물원(고이시카와 식물원)에서 왕벚나무 표본을 확보해 분석했다. 연구자들은 13일 “완전한 유전체를 비교한 결과 제주 왕벚나무와 일본 왕벚나무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서로 다른 식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2.jpg » 제주 왕벚나무와 일본 왕벚나무, 다른 벚나무 근연종 사이의 유전적 분화 정도를 보여주는 그래프. 백승훈 외 (2018) ‘게놈 바이올로지’ 제공.

주 저자의 하나인 최경 국립수목원 박사는 “제주 왕벚나무와 일본 왕벚나무 사이에 유전적 뒤섞임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이제까지 나돌던 제주의 왕벚나무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왕벚나무가 됐다거나 그 반대라는 주장은 유전적 근거가 없음이 밝혀진 셈이다. 

교신저자인 문정환 명지대 생명과학정보학과 교수는 “이번 자생 왕벚나무 유전체 해독을 통해 왕벚나무를 둘러싼 원산지와 기원에 관한 논란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며 “제주의 왕벚나무는 제주 것이고 일본의 왕벚나무는 일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거리와 공원에 심은 수많은 벚나무는 일본에서 개량한 요시노 품종이지만 베어내는 등 적대적일 필요는 없다”며 “벚나무의 기원을 알고 즐기면 된다. 나무에 무슨 국적이 있느냐”고 덧붙였다.

512.jpg » 올 4월 6일 서울 여의도 윤중제의 벚꽃 축제 모습. 창경원에 심은 일본 왕벚나무를 옮겨 심은 것이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이번 연구에서 제주 왕벚나무는 올벚나무를 모계로, 벚나무를 부계로 태어난 1세대 자연 잡종임이 확인됐다. 같은 벚나무 속의 이들 종은 3㎞ 범위에서 함께 분포하며 3월 말∼4월 중순까지 2주 동안의 개화기가 일부 중복돼 잡종화할 조건이 갖춰져 있다고 연구자들은 밝혔다. 이런 교잡의 기회는 드물게 찾아오며, 따라서 제주 왕벚나무의 전체 개체수는 약 200개체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올벚나무와 벚나무는 어떻게 종의 장벽을 넘어 잡종을 이룰 수 있었을까. 연구자들은 “벚나무는 자신의 꽃가루가 암술에 묻더라도 싹이 트지 못하게 하는 자가수분 억제 장치가 돼 있는데, 가까운 다른 종에는 꽃가루받이를 허용하는 특성이 있음이 이번 연구로 밝혀졌다”라고 밝혔다. 문 교수는 “이처럼 근친교배를 막으면서 종간 교배에 융통성을 부여한 것은 섬이라는 고립된 환경에 적응한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자생하는 올벚나무와 벚나무의 자연 잡종으로 태어난 제주 왕벚나무는 자연적으로 새로운 종이 탄생하는 증거로서 학술 가치가 크다고 연구자들은 밝혔다. 제주 왕벚나무의 81%는 이런 1세대 잡종이고, 나머지는 왕벚나무가 부·모 종인 올벚나무나 벚나무와 다시 잡종을 이루는 역교배 잡종으로 잡종화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3.jpg » 제주 왕벚나무의 잡종 형성 과정. 백승훈 외 (2018) ‘게놈 바이올로지’ 제공.

최경 박사는 “이번 연구는 야생 목본 식물 가운데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제주 왕벚나무의 전체 유전체를 해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식물의 게놈 연구는 주로 농작물 등 초본과 나무 가운데는 사과 등 과실수를 대상으로 이뤄졌을 뿐 야생 수목은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한편, 이번에 연구대상인 제주의 왕벚나무 기념목 가운데 한 그루는 게놈 분석 결과 제주 자생종이 아니라 일본 재배종과 거의 같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 나무는 밑동 둘레 3.45m의 거목으로 나무의 모양과 개화 형질이 뛰어나 2015년 국립산림과학원과 제주도가 왕벚나무 자원화의 기준이 되는 ‘어미나무’로 지정한 개체다. 연구자들은 재배하던 일본 왕벚나무가 어떤 이유에선가 한라산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했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Baek et al. Draft genome sequence of wild Prunus yedoensis reveals massive inter-specific hybridization between sympatric flowering cherries, Genome Biology (2018) 19:127, https://doi.org/10.1186/s13059-018-1497-y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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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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