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물개 대량포획의 그늘, 유전자 ‘병목 현상’

조홍섭 2018. 11. 23
조회수 11784 추천수 1
수백만 마리 죽어 유전 다양성 20%로 줄어
전체 종 3분의 1이 멸종 직전 보호로 극적 회복

s1.jpg » 불과 수십 마리로 줄어 멸종 코앞에 놓였다가 보호조처로 현재 20만 마리로 불어난 북방코끼리물범 무리가 한가한 오후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유전 다양성은 아주 작아 돌림병이나 환경변화에 매우 취약하다. 마틴 스토펠, 빌레펠트대 제공.

같은 벼라도 키 작은 품종은 바람에, 큰 품종은 홍수에 잘 견딘다. 나락이 적어도 병충해에 강한 품종도 있다. 이처럼 형질이 다양할수록 환경 변화나 병·해충을 이기고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 야생동물도 마찬가지다. 유전 다양성이 풍부해야 멸종할 위험이 적다.

인간에 의한 대량 살육이나 기후 변화, 돌림병 등은 해당 종의 유전 다양성을 떨어뜨린다. 소수의 형질만 살아남기 때문이다. 이를 유전자의 ‘병목 현상’이라고 부른다. 18∼19세기 동안 서구에서 상업적으로 수백만 마리를 포획한 물개(기각류)는 병목 현상이 어떤 결과를 빚었는지 알아보기에 적합한 동물이다. 이를 위해 요셉 호프만 독일 빌더펠트대 교수 등 국제 연구진은 전 세계 물개류 30종의 유전자 자료를 분석했다.

호프만 교수는 유전적 병목 현상에 대해 “어떤 종의 유전적 다양성이 줄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기생충이나 병원체를 이길 확률이 낮아진다. 유전자 풀은 공구 상자에 비유할 수 있다. 공구의 수가 적을수록 달라지는 상황에 대응하기 힘들어진다”고 이 대학 보도자료에서 설명했다.

s2.jpg » 18∼19세기 동안 서구는 모피와 가로등 기름, 화장품으로 쓰기 위해 번식지에 모인 물개류를 수백만 마리 살육했다. 1890년대 알래스카 세인트 폴 섬에서 물개를 잡는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연구 결과 대량 포획으로 전체 물개류 종의 3분의 1 가까이가 멸종 직전의 상황에 몰렸던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20세기 초 상업 물개잡이를 세계적으로 금지하면서 물개류가 회복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상업적 포경과 물개잡이가 중단된 것은 인도적이거나 생태적 고려에서가 아니라 석유 등 새로운 화석연료가 대량 공급됐고 남획으로 대량 포획 자체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남획의 타격을 심하게 받아 유전 다양성이 급격히 준 종들도 있다. 북방코끼리물범, 지중해몽크바다표범, 하와이몽크바다표범, 사이마고리물범 등 4종의 유전 다양성은 상업적 포획 이전의 20% 수준으로 떨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사냥이 손쉬운 생태적 특징을 지녔거나, 서식지가 좁은 데다 오랫동안 상업포획의 대상인 종이었다. 다음으로 큰 타격을 받은 종은 남극물개와 과달루페물개로 둘 다 모피용으로 인기 있는 사냥감이었다.

반대로 상업적 포획의 손길이 닿지 않은 남극의 게잡이물범과 웨델바다표범은 병목을 겪지 않았다. 또 수십만 마리가 사냥된 남아메리카바다사자와 수백만 마리가 포획된 북방물개도 유전자 병목 현상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광범한 포획에도 충분한 수의 개체가 외딴 해안이나 섬 등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s3.jpg » 북아메리카 태평양 해안에 널리 분포하는 북방코끼리물범의 번식지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북방코끼리물범도 특이한 사례다. 이 물범은 이번 연구에서 가장 심각한 병목 현상을 겪은 종으로 나타났지만 현재 가장 많은 수가 살고 있기도 하다. 북방코끼리물범 수컷은 커다란 코와 함께 1500∼2300㎏의 거대한 몸집을 자랑한다. 그러나 가죽은 모피로, 지방층은 가로등 기름과 화장품으로 쓰이는 바람에 마구잡이 상업적 포획의 대상이 됐다. 19세기 말 20∼40마리까지 줄어들어 한때 멸종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보호 조처와 함께 극적으로 복원돼 현재 북아메리카 태평양 해안에 20만 마리 이상이 산다.

북방코끼리물범은 개체수가 많아 보호종으로 지정돼 있지 않다. 그러나 웃자란 작물처럼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은 멸종위기종을 실은 ‘적색 목록’에서 이 종에 대해 이렇게 기술한다. “이 종은 아주 적은 생존 개체로부터 회복했다. 유전적 병목을 거치면서 다양성을 많이 잃었기 때문에 돌림병과 환경 변화 위협을 더 크게 받을 수 있다.”

연구자들은 육지에서 번식하는 종이 얼음 위에서 번식하는 종보다 상업적 물개잡이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았다고 분석했다. 육지 번식지에는 더 많은 물개가 촘촘하게 모여들었고 사냥꾼이 접근하기 좋아 사냥 압력이 더욱 높았다.

또 수컷 한 마리가 다수의 암컷으로 이뤄진 할렘을 이뤄 번식하는 종도 큰 번식 집단이 정해진 시기에 형성되어 사냥의 단골 표적이 됐다. 암컷 50마리에 수컷 하나로 구성된 북방코끼리물범은 그런 대표적 사례였다.

Blanchon-idlm2006.jpg » 캐나다, 그린란드, 나미비아 등에서 물개류의 포획은 계속돼 동물 학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주요 포획 대상인 하프 물범.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물개류의 상업적 포획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독일 동물보호협회의 자료를 보면 해마다 캐나다, 그린란드, 나미비아 등에서 75만 마리의 물개류가 잡히고 있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M. A. Stoffel et al, Demographic histories and genetic diversity across pinnipeds are shaped by human exploitation, ecology and life-history. Nature Communications, http://doi.org/10.1038/s41467-018-06695-z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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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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