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만 년 세월이 시루떡처럼 차곡차곡
<3부> ⑨ 퇴적층 교과서, 변산 격포리
가로 세로 10여㎞에 깊이 500m 규모 추정
켜켜이 홍수와 사태, 화산분출 흔적 촘촘

공사장의 절개지이든 산사태로 드러난 절벽이든 지질학자들은 노출된 지층(노두)을 좋아한다. 그곳에선 과거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전북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해안가는 채석강과 적벽강으로 유명한 관광지 못지 않게 지질학 명소이다. 암회색 지층이 시루떡처럼 촘촘하게 쌓여있는 까마득한 절벽은 공룡시대가 저물 무렵 수천만 년 동안 깊은 호수 밑바닥에 쌓인 퇴적층이다. 여기서 지질학자는 오랜 역사책을 한 줄 한 줄 해독해 나가듯, 켜켜이 쌓인 퇴적층이 간직한 홍수와 사태, 화산분출의 흔적을 더듬는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수천만 년에 걸친 시간여행
지난 1일 박재문 박사(전북과학고 지구과학 교사)의 안내로 ‘퇴적층의 교과서’로 일컬어지는 격포리 퇴적층을 둘러봤다.
격포리 퇴적층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최근에 쌓인 것이다. 따라서 궁항에서 시작해 봉화봉 해안, 채석강(닭이봉 해안), 적벽강 순으로 해안으로 따라가면, 처음 호수가 생겼을 때부터 용암에 묻혀 호수가 사라질 때까지 수천만 년에 걸친 시간여행을 하는 셈이 된다.
썰물 때 격포항 옆 채석강을 찾으면 해변 바닥에 널따랗게 깔린 퇴적층의 평면과 닭이봉 절벽의 단면을 함께 볼 수 있다. 변산반도에서 서해 쪽 끄트머리인 이곳은 파도의 힘을 정면으로 받는다. 파도에 깎인 바닥 퇴적층(파식대지)에는 침식으로 자갈이 빠져나간 구멍이 점점 커진 역암층이 있는가 하면, 표면에 정체 모를 기하학적 무늬를 그린 지층이 나타나기도 한다. 박 박사는 “절벽에는 파도의 침식을 받아 해식동굴이 생기고 이것이 무너지면 파식대지로 모습을 바꾼다”고 설명했다.
약 50m 두께의 닭이봉 절벽의 퇴적층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퇴적층의 입자가 작아진다. 아래 부분이 강을 따라 퇴적물이 들어오는 들머리에 가깝다면 위로 갈수록 호수 가운데에서 쌓였음을 알 수 있다.
전승수 전남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는 격포리 층에 한꺼번에 쓸려 들어온 대규모 퇴적물이 많고 고운 입자가 쌓인 퇴적층에도 큰 자갈이 종종 들어있다는 점에 비춰, 아주 깊은 호수로 하천이 흘러드는 수중 급경사 삼각주에서 형성됐다고 해석한다.
세계적으로 드문 페퍼라이트 지층
절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퇴적과정이 늘 고요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가지런하던 지층이 구겨놓은 것처럼 뭉개져 있거나 대규모 사태로 쓸려온 토사가 물길을 메운 흔적도 선명하다.
김승범 한국석유공사 탐사사업처 박사(퇴적학)는 격포리의 옛 호수에서 벌어진 두드러진 자연현상을 ‘대규모 사태’라고 요약했다. 지각변동으로 깊이 패인 호수에 종종 대규모 홍수로 각종 퇴적물이 쏟아져 들어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이런 돌발적 사건은 10년이나 100년 또는 1000년 단위로 일어났겠지만, 평온하게 쌓인 지층을 깎아내고 큰 사건만 지층에 기록되기 때문에 실제보다 과장되게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채석강 하면 흔히 격포항 북쪽의 닭이봉을 떠올리지만 방조제 남쪽의 봉화봉 해안에도 볼 만한 퇴적층 절벽이 이어져 있다. 특히 이곳에선 호수가 생긴 초창기의 상황을 볼 수 있다. 격포항에서 나무다리를 따라 방파제 끝에 이르면 닭이봉에서보다 훨씬 큰 바위와 굵은 모래가 굳은 퇴적암을 만난다. 절벽에는 지반이 가라앉아 호수가 차츰 깊어지면서 강어귀의 퇴적층이 호수 안쪽으로 전진하면서 쌓인 길버트 삼각주가 드러나 있다.
중생대 백악기의 공룡들은 옛 격포호 기슭을 어슬렁거렸다. 김정률 한국교원대학교 지구과학교육과 교수는 2003년 이곳에서 수십 개의 용각류 공룡 발자국 화석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격포리 호수의 마지막 시기를 보려면 북쪽 적벽강으로 가야 한다. 이곳 퇴적층에는 장석이 많이 들어있는 유문암이 포함돼 있어 황색을 띤다. 적벽강에 들어서면 검은색과 노란색의 얼룩무늬를 한 해안절벽이 눈길을 끈다. 주차장의 적벽강 안내판은 “숱한 전설을 안고 있다”고만 적었을 뿐 세계적으로 드문 페퍼라이트 지층이 있음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박재문 박사는 “최고의 자연학습장에 걸맞은 안내판과 학습시설이 아쉽다”고 말했다. 후추를 뿌린 것 같다는 뜻의 이 암석은 수분 함량이 높은 퇴적층을 뜨거운 마그마가 뚫고 올라오면서 격렬하게 끓어올라 유문암과 검은 이암이 뒤섞여 만들어졌다.

지표에 드러나 깎인 세월 200만년
격포리 퇴적층에는 군데군데 화산재가 굳은 응회암이 들어있다. 화산활동이 뜸했을 때 탄생한 호수는 분출이 다시금 격렬해지자 죽음을 맞았다. 화산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격포리 호수는 화산암 조각 등 퇴적물로 차츰 메워졌다. 땅속에 묻힌 퇴적층은 신생대 지반융기로 지표에 드러났고, 이후 약 200만 년 동안 빙하기와 간빙기를 거치며 파도와 비바람에 깎여 지금의 단면을 드러냈다.
눈에 보이는 격포리 퇴적층의 두께는 약 500m이다. 똑같은 퇴적층이 격포항에서 15㎞ 떨어진 위도에서도 발견된다. 따라서 퇴적층은 적어도 가로 세로 10여㎞에 깊이 500m 규모로 펼쳐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퇴적층이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쌓인 것인지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다. 격포리 층에서는 퇴적 연대를 가늠할 화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퇴적층을 뚫고 들어온 화성암의 절대연대를 측정해 추정하는 수밖에 없다.
김승범 박사는 “화산암 등의 연대가 6천만~9천만 년으로 나와 퇴적시기는 9천만~1억 년 전부터 수천만 년 동안 이뤄진 것으로 짐작할 뿐”이라고 말했다.



부안/글·사진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가로 세로 10여㎞에 깊이 500m 규모 추정
켜켜이 홍수와 사태, 화산분출 흔적 촘촘

공사장의 절개지이든 산사태로 드러난 절벽이든 지질학자들은 노출된 지층(노두)을 좋아한다. 그곳에선 과거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 시리즈 차례 ■ 제1부 격변의 시대 1. 북한산의 기원 2. 이동과 충돌 3. 한반도의 속살 4. 시간이 바뀐 곳 5. 백두대간의 탄생 6. 한국의 갈라파고스 7. 120만년의 화산분출 8. 꺼지지 않은 백두산 9. 용암 흐르던 한탄강 10. 땅이 흔들린다 제2부 생명의 땅 1. 소청도 스트로마톨라이트 2. 삼엽충의 바다, 태백산 분지 3. 3억년 전 원시림의 선물, 석탄 4. 시화호 공룡계곡 5. 거대 익룡 고향 군위 6. 최후의 피난처, 여수 7. 신생대 식물화석의 보고, 포항 8. 최종 빙하기 유산 강릉 경포호 9. 곰소만의‘떠다니는 섬’ 10. 단양 에덴동굴에 숨겨진 기후 비밀 제3부 한반도 지질 명소 1. 억겁을 견딘 ‘ 차돌’ 섬, 백령도 2. 부산 다대포 해안 3. 화강암 돔의 ‘보고’ 불암산 4. 돌 흐르는 강, 대구 비슬산 5. 원형의 섬, 인천 굴업도 6. 광주 무등산 주상절리대 7. 첫 일반공개 평창 백룡동굴 8. 진안 마이산 9. 퇴적층 교과서, 변산 격포리 ※ 기사 제목을 클릭하면 해당기사로 넘어갑니다. |
남쪽에서 북쪽으로 수천만 년에 걸친 시간여행
지난 1일 박재문 박사(전북과학고 지구과학 교사)의 안내로 ‘퇴적층의 교과서’로 일컬어지는 격포리 퇴적층을 둘러봤다.
격포리 퇴적층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최근에 쌓인 것이다. 따라서 궁항에서 시작해 봉화봉 해안, 채석강(닭이봉 해안), 적벽강 순으로 해안으로 따라가면, 처음 호수가 생겼을 때부터 용암에 묻혀 호수가 사라질 때까지 수천만 년에 걸친 시간여행을 하는 셈이 된다.
썰물 때 격포항 옆 채석강을 찾으면 해변 바닥에 널따랗게 깔린 퇴적층의 평면과 닭이봉 절벽의 단면을 함께 볼 수 있다. 변산반도에서 서해 쪽 끄트머리인 이곳은 파도의 힘을 정면으로 받는다. 파도에 깎인 바닥 퇴적층(파식대지)에는 침식으로 자갈이 빠져나간 구멍이 점점 커진 역암층이 있는가 하면, 표면에 정체 모를 기하학적 무늬를 그린 지층이 나타나기도 한다. 박 박사는 “절벽에는 파도의 침식을 받아 해식동굴이 생기고 이것이 무너지면 파식대지로 모습을 바꾼다”고 설명했다.
약 50m 두께의 닭이봉 절벽의 퇴적층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퇴적층의 입자가 작아진다. 아래 부분이 강을 따라 퇴적물이 들어오는 들머리에 가깝다면 위로 갈수록 호수 가운데에서 쌓였음을 알 수 있다.
전승수 전남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는 격포리 층에 한꺼번에 쓸려 들어온 대규모 퇴적물이 많고 고운 입자가 쌓인 퇴적층에도 큰 자갈이 종종 들어있다는 점에 비춰, 아주 깊은 호수로 하천이 흘러드는 수중 급경사 삼각주에서 형성됐다고 해석한다.
세계적으로 드문 페퍼라이트 지층

절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퇴적과정이 늘 고요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가지런하던 지층이 구겨놓은 것처럼 뭉개져 있거나 대규모 사태로 쓸려온 토사가 물길을 메운 흔적도 선명하다.
김승범 한국석유공사 탐사사업처 박사(퇴적학)는 격포리의 옛 호수에서 벌어진 두드러진 자연현상을 ‘대규모 사태’라고 요약했다. 지각변동으로 깊이 패인 호수에 종종 대규모 홍수로 각종 퇴적물이 쏟아져 들어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이런 돌발적 사건은 10년이나 100년 또는 1000년 단위로 일어났겠지만, 평온하게 쌓인 지층을 깎아내고 큰 사건만 지층에 기록되기 때문에 실제보다 과장되게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채석강 하면 흔히 격포항 북쪽의 닭이봉을 떠올리지만 방조제 남쪽의 봉화봉 해안에도 볼 만한 퇴적층 절벽이 이어져 있다. 특히 이곳에선 호수가 생긴 초창기의 상황을 볼 수 있다. 격포항에서 나무다리를 따라 방파제 끝에 이르면 닭이봉에서보다 훨씬 큰 바위와 굵은 모래가 굳은 퇴적암을 만난다. 절벽에는 지반이 가라앉아 호수가 차츰 깊어지면서 강어귀의 퇴적층이 호수 안쪽으로 전진하면서 쌓인 길버트 삼각주가 드러나 있다.
중생대 백악기의 공룡들은 옛 격포호 기슭을 어슬렁거렸다. 김정률 한국교원대학교 지구과학교육과 교수는 2003년 이곳에서 수십 개의 용각류 공룡 발자국 화석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격포리 호수의 마지막 시기를 보려면 북쪽 적벽강으로 가야 한다. 이곳 퇴적층에는 장석이 많이 들어있는 유문암이 포함돼 있어 황색을 띤다. 적벽강에 들어서면 검은색과 노란색의 얼룩무늬를 한 해안절벽이 눈길을 끈다. 주차장의 적벽강 안내판은 “숱한 전설을 안고 있다”고만 적었을 뿐 세계적으로 드문 페퍼라이트 지층이 있음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박재문 박사는 “최고의 자연학습장에 걸맞은 안내판과 학습시설이 아쉽다”고 말했다. 후추를 뿌린 것 같다는 뜻의 이 암석은 수분 함량이 높은 퇴적층을 뜨거운 마그마가 뚫고 올라오면서 격렬하게 끓어올라 유문암과 검은 이암이 뒤섞여 만들어졌다.

지표에 드러나 깎인 세월 200만년
격포리 퇴적층에는 군데군데 화산재가 굳은 응회암이 들어있다. 화산활동이 뜸했을 때 탄생한 호수는 분출이 다시금 격렬해지자 죽음을 맞았다. 화산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격포리 호수는 화산암 조각 등 퇴적물로 차츰 메워졌다. 땅속에 묻힌 퇴적층은 신생대 지반융기로 지표에 드러났고, 이후 약 200만 년 동안 빙하기와 간빙기를 거치며 파도와 비바람에 깎여 지금의 단면을 드러냈다.
눈에 보이는 격포리 퇴적층의 두께는 약 500m이다. 똑같은 퇴적층이 격포항에서 15㎞ 떨어진 위도에서도 발견된다. 따라서 퇴적층은 적어도 가로 세로 10여㎞에 깊이 500m 규모로 펼쳐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퇴적층이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쌓인 것인지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다. 격포리 층에서는 퇴적 연대를 가늠할 화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퇴적층을 뚫고 들어온 화성암의 절대연대를 측정해 추정하는 수밖에 없다.
김승범 박사는 “화산암 등의 연대가 6천만~9천만 년으로 나와 퇴적시기는 9천만~1억 년 전부터 수천만 년 동안 이뤄진 것으로 짐작할 뿐”이라고 말했다.



부안/글·사진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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