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통 앞에서 바나나 먹으면 안 되는 이유

조홍섭 2018. 05. 23
조회수 68795 추천수 1
벌-그 생태와 문화의 역사(노아 윌슨 리치 지음, 김슨윤 옮김/ 연암서가, 2만원)
꿀벌 경고 페로몬과 비슷한 냄새 풍겨…페로몬 막으려 훈연기 사용
높이 나는 드론 수벌만 여왕봉과 짝짓기, 음경 폭발로 ‘비극적 행운’

b1.jpg » 라벤더에 날아든 꿀벌. 벌은 사람과 뗄 수 없는 관련을 맺는 동물이다.

꿀벌 하면 달콤한 꿀과 따끔한 침이 함께 떠오른다. 세계적이 꿀벌 떼죽음 현상이 생태위기를 환기시키는가 하면, 도시 양봉이 새로운 생태농업으로 주목받기도 한다. 그러나 꿀벌을 포함해 2만 종의 벌이 지구에 산다. 사람이 벌과 함께 한 역사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오른다. 이처럼 벌은 사람과 가까운 동물이지만 벌에 관한 궁금증을 풀어줄 책은 국내에 거의 없다. 벌의 진화와 생태는 물론 문화와 양봉에 이르기까지 ‘벌의 자연사’를 한 데 모은 책이 번역돼 나왔다.

미국의 벌 전문가이자 도시 양봉 활동가인 노아 윌슨 리치 박사의 책 ‘벌-그 생태와 문화의 역사’(김승윤 옮김/ 연암서가·2만원)에서는 우리가 몰랐던 벌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여럿 접할 수 있다. 1억년 전 꽃 식물이 등장하면서 다양한 종으로 진화한 벌은 주둥이의 길이에 따라 분류하지만, 흔히 혼자 사는 벌과 뒤영벌, 침 없는 벌, 꿀벌 등 네 집단으로 나눈다.

b2.jpg » 이집트 19왕조 세티 1세의 무덤 벽화에 그려진 벌의 모습.
 
이 가운데 꿀벌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벌이지만 그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많다. 이집트 동굴벽화를 보면 기원전 2400∼5000년에 이미 양봉가들은 바구니 표면을 진흙으로 덮은 벌통을 만들었다. 기발하게도 이들은 뗏목에 벌통을 설치하고 나일 강을 따라 흘러가며 이동식 양봉을 하기도 했다.

꿀벌 가운데 수벌은 침이 없지만 일벌은 침입자를 격퇴하기 위해 산란기관이 변한 침을 쏜다. 일벌의 침에는 미늘이 있어 상대의 몸속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않고 계속 독물을 주입하는 기능이 있지만, 독샘에 연결된 내장도 함께 빠져나와 침을 쏜 일벌은 목숨을 잃는다. 여왕벌은 일벌보다 긴 침이 있지만 미늘이 없어 재사용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여왕벌의 침은 침입자가 아니라 벌집에 있는 다른 여왕벌을 죽여 왕권을 유지하는 데 쓰기 때문이다.

일벌이 침을 쏠 때는 침샘에서 경고 페로몬을 분비해 동료에 비상상황을 알린다. 그런데 바나나에서도 일벌이 경계경보로 착각할 비슷한 냄새가 난다. “양봉가는 아침 식사로 바나나를 먹지 말라”는 격언이 나온 이유다. 양봉가들이 벌통에서 작업할 때 연기를 뿜는 훈연기를 쓰는 것도 연기가 페로몬을 교란해 벌들이 성내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b4.jpg » 긴 주둥이를 지닌 단독 생활벌의 일종. 벌에는 2만 종이 있다.

뒤영벌은 더 그렇지만 꿀벌은 덩치에 견줘 날개가 빈약해 어떻게 비행에 필요한 양력을 얻는지 오랜 수수께끼였다. 최근 벌의 독특한 날갯짓이 몸 앞에 소용돌이를 만들어 추가 양력을 얻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영어로 ‘드론’은 수벌을 가리키는데 비행과 관련이 있다. 수벌은 여왕벌의 미수정란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아버지가 없지만 할아버지는 있다’. 수벌이 하는 유일한 일은 여왕벌과의 짝짓기다. 혼인비행에서 가장 높이 나는 수벌만이 비극적 행운을 잡는다. 절정의 순간 수벌의 음경이 최대한 부풀었다가 폭발하는데, 뻥 터지는 소리와 함께 수정이 일어난다.

b3.jpg » 벌은 두 개의 겹눈과 세 개의 홑눈이 있다. 자외선을 볼 수 있다. 사람보다 더 파랗고 보랏빛으로 세상이 보인다.

수벌은 짝짓기까지 석 달 정도 살지만 일벌은 바쁜 여름에는 한 달 정도 겨울에는 3∼6개월 산다. 여왕벌은 알을 낳으며 여러 해 산다. 알에서 깬 일벌 유충은 여왕벌이 먹는 것과 똑같은 로열젤리를 짧은 기간 동안만 먹은 뒤 벌떡을 먹고 1주일 자라 번데기가 된다. 봉인된 새끼 방에서 깬 어린 일벌이 한 달 동안의 생애 동안 온전히 꽃을 찾아다니며 보내는 것은 아니다. 처음 벌집 청소와 새끼 돌보기를 거쳐 출입구 지키기를 하고 마지막에 꽃꿀과 꽃가루를 찾아 나간다. 진화생물학자들은 꿀 따기가 상대적으로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일벌에게 맡기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b5.jpg » 꿀을 따고 꽃가루를 모으는 일은 위험하고 힘들다. 한 달 수명의 일벌은 마지막 주에 밖으로 나간다. 벌은 길을 찾는 데 단거리에는 후각, 장거리에는 태양의 편광을 이용한다.

벌은 인간에게 꿀과 밀랍, 프로폴리스, 로열젤리, 심지어 벌 독까지 제공하지만, 가장 중요한 기능은 화분 매개이다. 전 세계의 작물 130종 이상이 꽃가루받이를 벌에 의존한다. 미국에서만 꿀벌이 차지하는 경제적 기여가 연간 15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꽃가루는 벌이 꽃을 찾아다닐 때 벌의 몸이나 다리의 털에 정전기의 힘으로 들러붙었다 암술머리로 옮겨진다. 그러나 뒤영벌 등은 진동을 이용한 전혀 다른 방식으로 화분을 매개한다. 이들은 꽃을 붙잡고 날개 근육을 빠르게 진동시켜 꽃가루가 빠져나오도록 하는데, 식탁의 소금 병을 흔들어 소금이 나오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처럼 진동 화분 매개를 하는 식물은 가지, 토마토, 감자 등 가지 속 식물이나 블루베리 등 꽃식물의 8%에 이른다.

b6.jpg » 군집이 과밀해지거나 여왕벌이 늙으면 페로몬 분비가 약해지면서 분봉이 일어난다. 원 군집의 반이 새 여왕벌을 키우기 위해 남고 옛 여왕벌이 나머지 군집과 함께 새 집을 찾아 떠난다. 분봉 때는 보호할 새끼가 없어 공격적이지 않다.

김승윤 한국 생태도시 네트워크 사무총장은 “유네스코회관 옥상에 생태공원을 만들어 가꾸다가 나중에 도시 양봉도 하게 됐는데, 벌의 생태와 문화까지 아우른 책이 없어 아쉬웠다”고 이 책을 번역한 동기를 밝혔다.

글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사진 연암서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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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메일 : ecothink@hani.co.kr       트위터 : eco_th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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