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땅에서의 죽음’ 로드킬 첫 영화화

조홍섭 2008. 10. 23
조회수 29766 추천수 0

황윤 감독의 생태다큐 <어느 날 그 길에서> 상영
전파발신기 추적 압권…카메라 동물 눈높이 맞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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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에워싼 88 고속도로, 섬진강변 도로, 국도 19호선 산업도로의 로드킬(야생동물 교통사고) 조사에 나선 서울대 환경계획연구소 최태영 연구원은 애초 로드킬이 잦은 특정한 도로구간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2004년부터 2년반 동안 5769건의 사고지점을 점으로 표시해 나가다 보니 지도에는 어느새 도로의 온전한 모양이 그려졌다. 야생동물에게 ‘길 위의 죽음’은 어디서나 벌어지는 일상이었다.

 

로드킬을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가 나왔다. 황윤 감독의 영화 <어느 날 그 길에서>가 오는 27일 서울, 부산, 대구, 대전, 광주 등 5개 예술영화전용관에서 동시 개봉된다. 생태 다큐멘터리가 개봉관에서 상영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5개 도시 예술영화전용관 동시 개봉…생명보험 들고 찍어

 

영화는 도로변을 헤매는 대책 없이 느린 토종거북 남생이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자동차의 속도는 야생동물이 감당하기엔 너무 빠르다. 두꺼비 ‘섬(蟾)’ 자를 쓸 만큼 두꺼비가 많은 섬진강 강변도로는 번식기 두꺼비들의 공동묘지다. 조사단은 10m 거리에서 납작하게 깔려 껍질만 남은 두꺼비 70마리를 확인하기도 했다. 이 길에는 “당신은 지금 가장 아름다운 길을 가고 있습니다”란 지자체의 안내팻말이 붙어 있다.

 

영화는 화면을 멀리서 잡는 등 끔찍한 장면을 피하려 애쓰지만, 태아를 쏟아내고 죽은 고라니, 내장이 튀어나온 채 몸을 뒤틀고 입을 벌리며 고통스러워 하는 유혈목이(꽃뱀)의 모습마저 없애지는 못한다.

 

동물 다큐를 찍는 황 감독의 눈은 철저하게 동물과 같은 높이에 서 있다. 두꺼비는 까마득한 4차선 도로를 전력을 다해 기어가다 굉음을 내며 달려드는 화물차 바퀴 사이에서 기겁을 해 움츠러들기를 반복한다.

 

왜 밀렵은 우리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데 훨씬 많은 동물들을 죽이는 로드킬은 그렇지 않을까. 그것은 자동차를 탄 자와 길에서 걷는 자의 차이일 것이다. 연구자와 영화 촬영자가 작업에 나서기 전 가장 먼저 한 일은 생명보험에 드는 일이었다. 이 영화는 철저히 걷는 자들의 시선으로 도로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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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관점에서 본 동물원 이야기 <작별>도 함께 개봉

 

도로는 야생동물에게 죽음의 유혹이기도 하다. 수많은 곤충이 자동차에 부닥쳐 죽어가고, 이를 먹으려고 또는 새로 생긴 로드킬 희생자를 먹이 삼아 새와 포유류들이 몰려든다.

 

도로 주변에 서식하는 너구리에 전파발신기를 붙여 추적한 결과는 놀랍다. 마치 고무줄놀이를 하듯 너구리는 도로를 넘나든다. 로드킬연구팀의 최천권 연구원은 “이곳은 애초에 동물들 땅이에요. 우리 땅이 아니에요”라고 설명한다.

 

한 살난 삵 ‘팔팔이’의 이야기는 극적이다. 팔팔이는 88고속도로 전북 남원 지역에서 자동차에 치여 의식불명에 빠진 뒤 전남 구례의 구조센터로 실려갔다. 가까스로 회복돼 전파발신장치를 찬 채 방사된 이 삵은 한 달만에 30㎞ 떨어진 고속도로변 ‘고향’으로 찾아갔다. 12번이나 위험한 도로를 건너 돌아간 그 곳에서 팔팔이는 나흘만에 또 다른 ‘로드킬’ 희생자가 됐다. 설 연휴 때 일어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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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도로건설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제기라고 할 만하다. 생태통로 등 성급한 대안을 내놓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황 감독은 “도로를 전속력으로 달려 인간이 다다르게 될 곳은 어디일까”라고 묻고 있다.

 

이 영화와 함께 동물의 관점에서 본 동물원 이야기를 다룬 황 감독의 다른 영화 <작별>도 함께 개봉된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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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메일 : ecothink@hani.co.kr       트위터 : eco_th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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