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유해 화학물질 배출 ‘알 권리’ 아세요?

조홍섭 2008. 10. 23
조회수 20443 추천수 0

한 해 내뿜는 발암물질 6천t·환경호르몬 127t
전체 사업장별 공개, 2010년으로 다시 미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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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인도 보팔에서 다국적기업 유니온 카바이드의 농약공장이 유독물질 누출 사고를 일으켰다. 주민 8천여명이 사망하고 더 많은 수가 실명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끔찍한 소식에 접한 많은 이들은 자기 지역에서도 이런 시한폭탄이 째깍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전전긍긍했다.

 

미국 정부는 1986년 기업이 배출하거나 이동시키는 유해물질의 종류와 양을 주민에게 공개하는 '비상계획 및 지역사회 알 권리법'(통칭 알 권리 법)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만들었다. 이런 발 빠른 대응에는 시민 100만명이 서명하는 등 시민운동의 압박이 크게 작용했다.

환경분야에서 알 권리 법은 다른 어떤 제도보다 뛰어난 성과를 거뒀다. 미국에서 법 시행 10년만에 유해화학물질 배출량이 절반으로 줄었다. 어떤 기업도 자기 지역에서 '발암물질 배출량 최고'라는 불명예를 견디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알 권리 법은 선진국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우리나라가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1996년 가입할 때 요구받은 조건의 하나도 유해화학물질 배출량 조사 제도의 도입이었다.

 

정부는 1999년 이 제도를 처음 시행했다. 하지만 화학제품 제조업과 석유정제업 두 업종에서 종업원 100명 이상인 극히 일부분만을 대상으로 한데다 기업별 배출량은 공개하지 않았다. 알 권리의 핵심 정보가 빠진 셈이다.

 

하지만 유해물질 배출실태가 지역별, 업종별로 집계돼 공개됐고 대상 기업도 늘어났다. 마침내 2004년 환경부는 "2008년부터는 유해물질 배출량을 사업장별로도 공개 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지난 8월 환경부는 59개 사업장의 배출량을 웹사이트(http://tri.nier.go.kr/triopen)에 공개하는데 그쳤다. 이들은 대부분 대기업들로서 환경부와 화학물질을 줄이겠다는 자발적 협약을 맺고 실천해 온 '모범생'들이었다. 약 3천개에 이르는 전체 사업장에 대한 정보공개는 다시 2010년으로 미뤄졌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를 훑어보면, 지난 몇 년 사이 유해물질 배출량이 현저히 줄어든 기업들이 많았다. 한국 바스프 여수공장은 2001~2004년 동안에도 해마다 50~74㎏의 독가스인 포스겐을 배출했지만 2006년의 기록은 0이다. 경북 구미의 제일모직 공장은 드라이클리닝 등 세정제로 쓰이는 발암물질 트리클로로에틸렌(TCE)을 2002년에는 25만㎏을 공기 속으로 배출했지만 2006년엔 4만5천㎏으로, 5분의 1로 줄었다.

 

1급 발암물질인 벤젠을 공기 속으로 내뿜는 공장들이 울산 등 산업단지에 자리 잡고 있는 사실도 드러났다. 울산의 에스케이(SK)에너지는 2006년 5만5천㎏의 벤젠을 배출했고, 온산읍의 에스(S)오일은 3만7천㎏, 에스케이시(SKC)는 1만1천의 벤젠을 그 해에 내보냈다. 충남 서산시 대산읍의 현대오일뱅크에서도 2만㎏의 벤젠을 내보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배출량이 별로 줄지 않는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과자, 분유, 원두커피 등 먹을거리와 구두 등 공산품에서 ㎎ 단위의 유해물질이 검출돼도 온통 난리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한 해 동안 사업장에서 공기 속으로 내뿜는 발암물질은 6천t, 환경호르몬은 127t에 이른다.

 

사업장이 배출하는 1급 발암물질에는 벤젠과 포름알데히드가 대부분이고, 2급인 발암우려물질에는 TCE, 2급 발암가능물질에는 디클로로메탄이 많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공기 중으로 배출되고, 지역별로는 중화학산업단지인 울산과 전남 여수, 충남 그리고 사업장이 밀집된 인천과 경기에 몰려 있다.

 

발암물질이 사업장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 배출가스, 건설현장이나 공장에서 스프레이로 뿌리는 페인트, 농약살포, 가정제품 등에서 배출되는 유해물질의 양은 사업장 배출량의 3.4배에 이른다.

 

산업단지뿐 아니라 우리 동네 세탁소 등 유해물질을 내뿜는 시설은 사방에 널렸다는 얘기다. 공기 속으로 나온 발암물질을 모두 사람이 흡수하는 건 아니다. 생태계 먹이사슬을 거쳐 음식물에 농축된 것이 우리 몸에 들어온다.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유해물질 섭취를 줄이려는 노력을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누가 얼마나 많은 유해 화학물질을 배출하는지 아는 것이다. 화학물질 배출량 공개제도를 도입한 나라는 29개국에 이른다. 유럽연합을 비롯해 미국, 일본, 스위스, 멕시코,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이 포함돼 있다. 이 가운데 기업별 배출량을 제대로 공개하지 않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우리에겐 이들이 어느 기업에서 나오는지 당연히 알 권리가 있다.

 

조홍섭 한겨레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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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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