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장 파보니 시커먼 기름덩어리 그대로
해양오염평가단 태안 현장조사 동행
검은 얼룩 곳곳 남았지만 예전 모습 차츰 되찾아가
하지만 모래 속 기름 빼곡 악조건 속 바다생물 ‘사투중’
“야, 고둥이 많네!”
자원봉사하러 태안에 온 어린이가 소리쳤다. 물이 빠진 천리포 백사장엔 물결에 떠밀려온 서해비단고둥이 널려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대부분 살아있었다.
“거 참, 사람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모랫속으로 잽싸게 달아나던 놈들인데.” 태안이 고향인 박남철(50)씨는 기운을 못쓰고 비실대는 갯가 생물들을 보며 안쓰러워했다.
먹이를 걸러낸 모래를 벽돌처럼 쌓아 백사장에 집을 만드는 엽랑게는 엽렵해서 좀처럼 얼굴을 보기가 힘든 게이지만, 이날은 술취한 것처럼 집앞에서 얼쩡거렸다.
갯고랑에는 빗조개가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해변가를 거닐며 살아있는 조개를 주워 본 적이 있는가. 십중팔구는 죽은 조개껍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날 태안 해변에서 발견한 조개의 절반은 살아있는 것들이었다. 썰물이 됐는데도 미처 모랫속으로 파고들지 못한 것들이었다.
문득, 새만금 개펄의 모습이 떠올랐다. 방조제가 가로막힌 뒤 큰 비가 오자 염도변화로 기력을 잃은 수많은 백합 등 조개들이 펄 밖에서 꾸물대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6일 사상 최악의 기름유출 사고 이후 꼭 한 달이 된 충남 태안의 해변가에 갔다. 일요일이자 포근한 날씨 덕에 “자원봉사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결코 그 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라고 쓴 펼침막들을 지나쳐 자원봉사자들을 태운 버스와 승용차들이 태안으로 꼬리를 물었다.
지난 한 달 동안 언론은 태안의 죽음에서 희망과 부활의 조짐을 찾으려 애써왔다. 물결을 이룬 자원봉사자들은 상당량의 원유를 제거했고 시름에 빠진 지역주민에게 힘을 주었다. 하지만 가장 방제작업이 잘 돼 있다는 만리포와 천리포의 깔끔해진 겉모습 속에도 아직 죽음의 그림자가 어려 있었다.
이곳에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캐나다의 도움을 받아 국내·외 전문가와 지역주민, 학계, 환경단체가 모두 참가하는 해안오염평가작업(SCAT)이 5개 팀으로 나눠 진행되고 있었다. 이날 천리포 닭섬에서 만리포까지를 조사하는 팀을 따라 나섰다. 팀원인 정종관 충남발전연구원 환경생태팀장은 “우린 드림팀”이라고 자랑했다. 캐나다 환경부 환경비상대응관인 앙드레 라플람, 새 전문가인 국립환경과학원 김창회 박사, 서울대 해양학과 박사과정인 권봉호씨, 서산태안환경운동연합 활동가 도숙정씨가 조사에 참가했다.
천리포해수욕장은 기름으로 얼룩진 제방벽을 빼놓으면 오염 전과 흡사했다. 기름냄새도 나지 않았고 파도는 푸른빛이었다. 그러나 조사단이 백사장에 20㎝ 깊이로 구덩이를 파자 엷은 유막이 나타났다. 기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다.
정종관 박사가 백사장의 검은 띠를 가리켰다. 작은 모래알갱이처럼 생긴 검은 타르 볼이었다. 사고 초기 끈적끈적하게 해안에 늘어붙는 타르 덩어리가 타르 볼로 잘못 알려진 적이 있다. 타르 볼은 나무조각이나 검은 모래처럼 보이지만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갈색 가루가 되면서 기름냄새를 풍겼다. 원유는 형태와 크기를 바꾸면서 눈에 안 보이는 생태계 그물망으로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바퀴벌레처럼 쏜살같이 도망쳐야 할 갯강구들이 어슬렁거리는 방파제와 암석지대에서는 고온고압수를 이용한 방제작업이 한창이었다. 걸레질을 하는 자원봉사자들의 손길보다 훨씬 빠르고 깔끔하게 기름을 씻어냈다. “바위에 붙어있는 작은 생물들이 다 죽습니다. 내뿜는 증기의 온도에 제한이 있지만 조금이라도 넓은 지역을 방제하려는 업체는 더 뜨겁고 더 센 증기를 뿜으려는 유혹을 이기기 힘들죠.” 권봉호씨의 말이다.
그러나 무엇을 어디까지 정화할지를 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라플람은 “해수욕장 방파제에 얼룩진 기름은 환경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지만 관광객을 맞아야 하는 지역주민들에겐 충분치 않다”고 말했다. 이런 딜레마 때문에 이해관계자들이 참가한 조사팀이 꾸려진 것이다.
그는 “백사장에 해변과 평행하게 트랙터로 골을 여러개 파면 물이 잘 뒤섞여 스며든 기름이 빨리 분해될 것”이라며 “이런 방식으로 만리포와 천리포 백사장은 올 여름 개장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생태학자와 환경운동가들이 이런 방식에 찬성할지는 별개 문제이다.
만리포 해수욕장은 가장 많은 방제작업이 이뤄진 곳이다. 이곳에서도 바위에 있어야 할 총알고둥들이 모래 위를 헤매고 있었다. 소금을 뿌려야 깊은 굴에서 겨우 올라오는 맛 조개가 한 마리는 해변에 덩그마니 누워 거품을 뿜어대고 있었다.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조개껍질에 구멍을 내고 속을 녹여먹는 포식자인 큰구슬우렁이도 백사장 위에서 헐떡였다. 백사장에 판 구덩이에는 천리포에서보다 짙은 유막이 끼었다. 타르 볼의 기다란 띠도 발견됐다.
“기름이 사라질 때까지 몇 주가 걸릴지 몇 달이 걸릴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유츌된 기름 중 바다에 가라앉은 것들이 여름이 돼 수온이 높아지면 다시 떠오를 가능성도 있습니다.” 기름유출 사고를 많이 경험한 라플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직 기름오염의 상처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해변의 하나인 구름포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구름포에서 방재를 위해 임시로 낸 산길을 따라 동쪽 해안으로 건넌 소원면 ‘태배’에 닿자 역한 기름냄새가 울컥 풍겨왔다. 오일펜스로 막아둔 해변 바닷물에 무지개가 번져있었다. 삽으로 부서진 조개껍질로 이뤄진 해변을 파내자 찐득한 원유 덩어리가 그대로 나왔다. 한 주민은 “사리 때 기름파도가 덮친 위로 모래가 쌓였다”며 “해변을 다 걷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바닷가에는 가재 비슷하게 생긴 쏙이 여기저기 죽어서 떠있었다. 그 가운데는 알을 노랗게 밴 것도 있었다. 바다밑에 구멍을 뚫고 사는 이들도 기름을 피하지는 못했다. 기름은 거의 걷어냈지만, 그 피해는 이제부터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태안/글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영상 이규호 피디 pd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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