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바람숲에는 환경동네에서 쟁쟁한 필진이 가세했습니다. 지리산과 섬진강, 새만금과 금강, 김포와 한강하구, 4대강 등 현장을 지키는 활동가들, 그리고 환경정책과 분쟁, 에너지와 기후변화를 최일선에서 지켜보는 전문가와 블로거가 참여했습니다.
<물바람숲> 필진인 김성호 교수가 자연을 보는 방식은 참 색다릅니다. 어린아이처럼 호기심 많고 천진하면서도 동시에 끈질기고 분석적입니다. 그런 김성호교수가 어린 시절부터 최근까지 살아오면서 자연과 접하게 된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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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나"
초등학교 시절에는 방학만 되면 외가댁으로 갔다가 개학 전날에야 올라왔었습니다.
단칸방 생활, 작은 입 하나라도 줄여야 했던 어머니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은 조금 나중에 안 일입니다.
외가댁에 가는 길이 지금은 서해대교가 바다까지 가로질러 멀다 할 수 없지만 그 시절의 어린 나에게는 까마득히
먼 길이었습니다. 교통편은 기차였는데 서울에서 장항에 이르는 장항선은 언제나 발 디딜 틈마저 없을 정도로 붐볐습니다. 사람의 물결에 떠밀려 입구로 얌전히 걸어 올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방법은 하나였습니다.
큰외삼촌께서 먼저 기차에 오르시면 어머니는 나를 들어 올려 창문으로 간신히 밀어 넣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 즈음 나의 몸이 작고 허약했던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습니다.
웃고 계신 것인지, 울고 계신 것인지 잘 구분할 수 없었던 어머니의 표정을 남겨두고 움직이기 시작한 기차는 조금 가다 서고, 다시 조금 움직인다 싶으면 쉬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도착할 때까지 도대체 몇 번을 쉬는 것인지는 세다 지치고 또 졸음으로 지나쳐 제대로 헤아려 본 적이 없습니다. 설렘과 지루함이 뒤섞인 시간이 흘러 마침내 신례원역에 기차가 닿아 내려도 그리 반갑지는 않았습니다. 언제나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나타났던 버스를 타는 순간부터가 진짜 먼 여행의 시작이었으니 말입니다.(중략)
야트막한 산 서너 개를 넘어서면 탁 트인 평지가 펼쳐졌고, 그 드넓은 논 가운데 한 채 있는 집이 바로 외가댁이었습니다. 산모퉁이를 돌아서서 몇 발짝 지나면 아직도 거리는 아득히 남아 있는데 벌써 외가댁 마당으로는 나를 맞이하기 위한 행렬이 보였습니다. 아마도 외할머니께서는 아침부터 안방 쪽문에 구멍을 내고 붙여놓은 유리를 통해 내가 올 길을 바라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매번 산모퉁이를 돌아 조금 지날 때마다 정확히 마중을 나오실 수는 없었습니다.
외할머니만 마중을 나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외할아버지께서는 항상 앞마당에 그대로 서계셨지만, 맨 앞에 서셔서달려오듯 빠른 걸음으로 둑길을 따라 오셨던 외할머니의 뒤를 이어 둘째, 셋째, 막내 외삼촌, 큰 외숙모, 작은 외숙모, 이모, 외사촌 형, 외사촌 동생들 정말 대식구가 마중을 나왔었습니다.
잘난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그래서 누구에게서도 환대를 받지 못했던 시절이었기에
그 순간만큼은 정말 대단한 아이가 되어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겨운 만남 속에서 어린 가슴에도 따듯한 사람의 정이 조금씩 쌓이게 된 것 같습니다.
김성호 서남대 생명과학과 교수 <큰오색딱따구리 육아일기><동고비와 함께한 80일><까막딱따구리의 숲>의 저자.
새가 둥지를 틀고 어린 새들을 키워내는 번식일정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인내로 세세히 기록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지리산과 섬진강에서 만난 생명들의 20년 이야기를 담은 생태에세이 <나의 생명수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