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여름을 보내며

조회수 13411 추천수 0 2013.08.17 19:33:40

(여름을 보내며)

 

  가재.JPG

 

  어제 오후 비가 오심을 의식해 자연의 맑은 비를 흠씬 맞춰 줄 요량으로 서재로부터 바깥에 내어뒀던 5행 야생 산삼 화분을 깜박 잊고 그냥 그대로 바깥에서 밤을 새우게 하고 말았다. 아차! 아침도 늦은 시각에 뛰어 나가보니 잎새 다섯 장을 매단 줄기가 아래로 축 쳐진 채 그만 힘들어 죽겠단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다행이 비가 밤까지 지속되진 않았고 바람도 거의 없었음에 절체절명의 위기는 겨우 면한 듯, 늦은 8월이지만 아직은 강렬한 오전 햇살을 피해 서둘러 서재 그늘 안으로 들여다 놨다. 음지 그늘을 좋아하는 이 녀석을 오늘 같이 대명천지의 맑고 밝은 햇살 아래 뒀다간 두 시간이 채 못 돼 연약한 잎새가 타 죽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작년 7월경 생짜배기 야생에서 같은 5행의 크기로 얻어 온 녀석이라 생각보다 적응력은 강할 것이란 믿음은 있었다. 잘하면 내년쯤엔 두 줄기(각구)로 발전을 할 가능성이 농후한 괜찮은 모습이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자연과 똑같은 조건에서 제법 혹독한 체력 훈련과 생존 적응력의 기회가 됐을 것이다.

  줄기가 바닥에 대일 정도로 허리를 푹 숙이고 있음이란 다분히 방심한 내 탓이긴 해도 저 혼자 스스로 일어서라고 달리 도움을 주진 않을 참이다. 이 정도는 충분히 이겨낼 것이다. 원천에서 야생의 식생이라면 그것이 더 어울릴 따름이다.

  이젠 절기로서 처서도 지났으니 제 1년 동안 성장과 뿌리 숙성 의무는 거의 마쳤을 게다. 따라서 위 줄기와 잎새가 지금쯤 낙엽으로 넘어간다 해도 뭣보다 중요한 원 뿌리는 위험한 시기를 면했을 게다.

  같은 화분 안에 작년 비슷한 시기에 산에서 얻어 온 공부 관찰용 야생 산삼이 1,2,3년 생으로 나란하게 각각 한 뿌리씩 있었으나, 유독 가장 큰 3년 생 하나만 늦게나마 용케도 싹을 틔워줬다.

다음을 대비해 가을 양분 보충과 겨울 동계 저온 처리까진 무사히 수행했었지만, 이후 겨울을 나기 위한 마른 화분인 채로 깜박 잊고 있다가, 3월도 초순경에 내어놔야 할 것을 4월도 너무 늦게 생지에 내어놨더니, 미처 싹을 띄우지 못한 어린 두 뿌리는 잠을 자는지 아예 죽었는지 모르겠다. 내년엔 내어놓을 때를 놓치지 말고 주의를 기울여 지켜봐야겠다. 모두가 태생이 혹독한 야생이었음을 믿어줄 도리밖에 뾰족한 방법은 없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내 책상 앞에서 초록의 향연을 잔잔하게 펼쳐주는 바람에 안에서도 밖에서도 녹음의 향기와 24시간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던 방안의 귀한 벗이고 동반자였다. 내년엔 올해처럼 방심하지 않고 성의를 다 할 테니 다른 것들도 죽지 말고 부디 무사히 잠에서 깨어나 산골짜기 내 생활을 꼬박 지켜본 산증인이 돼 길이 함께 공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자연에서 얻어지는 모습들에서 신종은 갈수록 급격하게 줄어가고 있다. 새로운 종류란 앞으로 다가올 계절 늦은 가을꽃들만 일부 펼치거나 아직 준비하고 있을지언정, 탄생의 과정을 이미 마친 대부분의 생명류는 성숙기를 거쳐 수확기 또는 조락의 단계로 일부는 벌써 접어들었음을 알겠다.

  메뚜기들도 이전처럼 기어 다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펄펄 날아다닌다. 사마귀 종류도 터질 듯 덩치가 우람해졌다. 양으로 부쩍 늘어나 한낮의 공중을 완전히 장악하긴 해도 잠자리 종류 역시 작은 녀석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듯 모든 식생 안에서 어린 새끼를 찾아보긴 어려워졌다. 덕택에 하루에 안아 들이는 사진의 양도 절정기 그때보다 물경 절반 이하로 줄었다. 이젠 장성한 모습들 위주로 담아내며 이미 수납된 같은 종류 중에서도 약간씩 다른 다양한 표정을 살피기가 주된 일이 됐다. 이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효율은 떨어지고 재미와 보람도 덜한 일이다. 대신 혹간 얻어지는 잘된 모습들을 들여다보면 배경의 색감도 그렇거니와 잘 익은 과실처럼 그득함은 담겨있다. 결실기 황혼기의 팽만한 특징이랄 수 있겠다.

  막간의 틈을 이용해 알밤 모으기를 기대했지만 그도 일찌감치 종막을 예상해야하겠다. 올 가을 유난히 그악스러운 사람들 등쌀에 시즌이 시작하자마자 벌써 꼭대기 여물지 않은 몇 송이만 남겨놓곤 며칠간의 새벽을 틈타 왕창 털리고 말았다. 오솔길 가에 함부로 즐비한 파란 빈 밤송이 껍질들이 아까운 세월과 사람들의 탐욕이 남긴 잔해처럼 참혹하게 보임은 피할 수가 없다. 밤나무 동산에 생육이 늦은 토종밤이 아직 제철을 기다리고 있긴 해도 맘으로부터 기대감일랑 미리 접어뒀다. 어차피 내 것도 아니거니와 사람들이 그조차 조용히 내버려두진 않을 것이기에 그렇다.

  지천으로 흔할지언정 알밤이 물론 별스런 건 아니다. 하지만 사색과 운동 삼아 하루에도 몇 번씩 돌아다니는 초원 산책이란 소박한 계절적 일과를 잃어버린단 아쉬움이 약간은 남아있다. 오늘아침 마침내 아쉬움과 기대감을 마저 접어두자 맘은 차라리 편안해졌다.

 

  이제야말로 쓸 만한 문장에 몰입할 수 있을 것 같다. 미완으로 남겨뒀던 깊이 있는 내용들을 펼칠 시기가 앞당겨질 것 같단 말이며, 어쨌든 내겐 할 일이 없어 심심해하는 경우란 있을 수 없다. 주어진 상황에서 늘 생산적인 일거리는 넘치도록 넉넉히 준비돼있으니 말이다.

 

  가을빛은 하늘에서 이젠 정면으로 눈에 드는 동산 언저리 낮은 대기에까지 가깝게 전이되어있다. 하루 이틀 흩뿌린 비와 함께 만 리 먼 곳으로 스쳐지나 간 태풍 탓이기도 하겠지만, 희나리 한 톨 들어있지 않은 며칠 만에 만나는 참으로 청명한 대기, 벌써 그리워지는 올 여름도 드디어 끝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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