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두 번째로 귀중한 꽃은 바로 산삼 꽃입니다.
싸구려 똑딱이 디지털 카메라인지라 교환렌즈가 있을 리 없겠으니, 숫하게 실패를 거듭하다가 엉뚱한 렌즈 덧대기 초 접사 특수촬영에 성공해 겨우 볼 만할 따름입니다.
실물은 막상 확대경이 아니면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성냥골보다도 훨씬 작습니다. 제 자리인 깊은 숲 어두운 그늘 속에 있으면 쉬이 눈에 뜨일 리 없습니다.
나는 압니다. 가장 소중한 벼꽃과 다음으로 귀중한 산삼의 작고 음전한 꽃도 그렇거니와,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존재와 요소들은 의례 감춰지거나 눈에 덜 띄는 형태적 구조와 내밀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깨알 만한 심 꽃이 지자 당연한 듯 열매가 달리고 덩치를 크게 빠르게 키워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산삼은 학이가 양양 은거 시절에 공부차 화분도 아닌 반투명 플라스틱 반찬 그릇에서 키우던 걸 그냥 가지고 내려온 것이랍니다. 대견스럽게도 3구로 잘 성장한 올해 5송이의 첫 꽃을 피웠거니와 기대가 만당합니다.
아하! 꽃망울 하나는 결실에 실패했네요. 위에 심 꽃이 잘 숙성되어 여름도 8월경에 윤기도 곱게 드디어 콩알 만한 열매로 완전하게 익은 모습입니다. 발갛고 동글납작한 한 알갱이 안에 두 알씩 쌍으로 열매가 붙어있답니다. 이야말로 주홍색의 전형입니다.
옳습니다. 산삼 꽃도 벼 꽃도 크고 엄청 화려한 외모에 에너지와 기운을 헛되이 투입하느니, 모든 공력과 내력을 차라리 실속과 내면의 숙성에다 진력하겠다는 깊은 뜻을 읽어내기엔 어려움이 없습니다. 마치 공들여 잘 숙성시킨 결실일랑 자신있게 아낌없이 내어주면서도 실로 깨우침이 깊은 속사람이 겉보기 외면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과 흡사합니다.
인식론적 시각에선 크고 잘 생기고 이름난 또 비싼 원예종일수록 뭇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기 마련이며, 보는 이의 마음마다 짐짓 위로 받음을 장려할지언정 이를 나무랄 일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일시 솔깃함에 그치지 않을 재간이 없겠고 다분히 저자거리에 나도는 소모적 유행 성향이란 언급 또한 피할 순 없을 겁니다. 이에 존재론적 입장에선 역시나 벼와 산삼의 꽃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니 서로 역할이 다르다 해서 위로될진 모르겠지만, 종 다양성이란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개인별 취향 차이라고 인정해줄 순 있겠네요.
그러나 산삼 꽃처럼 참된 보배일수록 음전하고 깊숙이 숨겨져 있더라는 엄연함을 상정할 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관념적 성향 위에 선과 덕이란 행위상의 가치관에 이르면 존재론이라도 하늘과 땅 차이가 나더이다.
자연계 원천 생명론의 귀결점은 가치동등성을 표방하는 줄은 알겠지만, 객체로서 인간이란 행위의 공과로서 제 존재론은 평가받아야 한다는 엄중함도 난 알았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유명하고 탄복과 감탄을 거푸 불러 일으키는 원예 개량종 화훼들에 찾아드는 벌과 나비란 별로 기억에 없습니다. 속임수라고 말할 것까진 없겠지만 온갖 치장을 갖춰 입은 마네킹 인형처럼 다만 솔깃한 눈요깃거리에 그칠 뿐인 한갓 위장된 겉모습이란 생각을 뗄 수 없을 바에야, 거짓을 알 리가 없는 벌과 나비가 찾지 않는 무실속일 바에야, 난 멀리서 한번쯤 들여다 봐줄 순 있어도 손수 기르거나 가까이 안아 들이진 않을 작정입니다. 정도 주지 않을 것이니 허상이란 바로 이것을 지칭함인 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옳거니! 내가 못생긴 점에도 이 같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시속에 가벼운 사람들이 함부로 못난이라 칭해도 아니랄 말 않겠거니와, 실질에서 보다 상위의 요소인 진실성과 행동 가치에 충실할지언정 아름답지도 화려하지 않아도 이제의 내 모습을 나는 좋아라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