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겨우살이

조회수 10172 추천수 0 2012.02.05 04:53:58

(겨우살이)

 

같은 눈이 내려도 오롯한 운치에다 쓸쓸함까지 더해서 내리는 곳도 이곳만은 아니겠지만, 너무 춥지도 덥지도 않은 기상과 눈이 만났을 때 비로소 눈은 자신의 진면목을 내보여준다. 나뭇가지에 설화도 활짝 피워주고 그렇지 않아도 조용한 거리를 더 조용하게 만들어 놓는다.

산중에 내리는 눈을 유심히 살펴보면 흰색만이 아니다. 옅은 옥색일 때도 있고 온통 연 푸른색일 때도 있다. 역시 대도시에 내리는 질척하거나 도로가에 함부로 꽝꽝 얼어붙은 눈과는 우선 표정부터가 다름이다.

다른 소음이 거의 없는 조용한 지역이라 눈 내리는 미세한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다. 물리적인 의미로 눈 내리는 소리만이 아닌 것을 아는 사람은 안다.

완전한 정적 속에서야 눈은 자신의 내밀한 속내 비밀을 그렇게 이야기해주고 싶어 한다. 그래 그런지 대부분의 눈들은 낮에 오는 것보다 밤에 몰래 내리길 더 즐겨하는가 보다.

 

원래 눈이 많이 내리기로 유명한 강원도 산골이지만 영서지방보다 영동지방이 지형적 특성상 한 번에 내리는 눈의 양은 더 많다. 난 아직 진짜를 만나진 못했으나 이곳에선 한차례에 무려 2미터를 넘는 강설량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이곳 산간마을에 남자어른이라면 누구든 지금도 가족을 위한 설피 정도는 스스로 만들 수 있다. 예전 겨울 생활필수품 중 결코 빠질 수 없는 하나, 긴밀한 교통수단이기 때문이다.

발이 눈 속에 깊이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눈신발인 설피는 강설량이 60-70센티미터를 넘는 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독특한 것이다. 어지간한 체중의 사람들이라도 눈길에선 쉽게 70센티미터 정도는 빠진다. 아무리 부드럽고 연한 게 눈이라지만, 이정도 깊이는 장난이 아니다. 설피가 준비되지 않은 맨몸으론 불과 몇 백 미터도 걷지 못해 몸은 지치고 만다. 마냥 부드러워 보이던 눈도 이쯤에선 한순간에 냉혹한 죽음의 사신이 될 수가 있다.

대피할 장소가 마땅치 않은 산중에서 체력이 떨어지고 몸이 지친다면 체온 보존이 될 수가 없기에 금방 위기를 맞게 된다.

설피를 신으면 발이 눈 속에 빠지는 깊이를 20센티미터나 30센티미터 정도로 막을 수 있어서 설피에 익숙한 사람은 하루 종일이라도 어려움 없이 행동을 할 수가 있다. 이처럼 간단해 보이는 도구 하나가 때론 사람의 생명을 유지케 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이 지방 눈은 내려도 한참 많이 내린다.

 

결이 질긴 물푸레나무와 쇠가죽으로 정성들여 만든 다음 관리만 치밀하게 한다면 한번 만들어진 설피를 무려 10년도 넘게 신을 수가 있단다. 한 계절을 잘 신고 난 뒤 설피의 쇠가죽을 다시 풀어 들기름도 듬뿍 먹이고 소나무 연기로 훈제시켜 좀이 스는 걸 막아줄 정도로 정성을 들인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대를 물려가며 사용할 수도 있다. 지금이야 발달된 중장비에다 길도 넓어지고 포장까지 말끔한 덕분에 설피의 필요성도 거의 사라지고 말았지만…….

 

깊은 눈이 사람에게만 불편을 주는 건 아니다. 막상 본판의 산중에선 인간들보다야 덜 하겠지만 곳의 주인인 뭇 산짐승들도 생존에 절대위기를 맞는 건 마찬가지이다.

겨울철, 그렇지 않아도 먹거리가 귀한 계절에 넓은 지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먹이를 모아들여야 할 어려운 시기에 내리는 무심한 눈은 특히 동물들의 생존엔 절대 방해물이 될 수밖에 없다.

네발짐승들의 발이 눈 속에 빠지게 되면 우선 배가 눈 위에 닿아 끌리게 된다. 배가 눈 위에 끌리게 되면 자연히 발끝이 땅에 닿지 못해 거의 공중에 뜨게 된다. 이건 산길을 걷는 게 아니라 눈 속을 떠서 헤엄치는 경우라 함이 옳겠다. 아무리 험악한 지형이라도 뛰고 달리기에 익숙하도록 발달된 산짐승들의 가느다란 다리가 눈 속에선 단지 꼬챙이가 될 뿐 적합하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그렇듯 눈에 약한 짐승일수록 눈도 적고 먹이도 풍부한 인가 근처를 어쩔 수 없이 찾게 되고, 당연히 사람들 눈에 자주 띄게 된다. 체력이 달리거나 노쇠한 짐승들은 그래서 겨울에 자연 도태되는 안타까운 경우가 얼마든지 많다. 모든 게 꽝꽝 얼어붙는 혹독한 계절엔 생존 자체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야 불법행위로 규정되어있어서 드러내놓고 산짐승을 잡을 수가 없어졌지만, 예전엔 이런 계절을 이용해 평소엔 어림도 없었던 멧돼지 사냥도 했었다. 그것도 간단하게 사냥총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지극히 원시적이고 전통적인 방법으로 2미터가 넘는 긴 나무 손잡이가 달린 날카로운 쇠창, 겨울 산중에선 다목적으로 쓰임새가 너른 쇠창으로 찔러서 잡는 것이다. 못할 것도 아닌바 쇠창의 날만 예리한 돌로 바꾼다면 원시석기시대 형편과 하나도 다름이 없음이다.

깊은 눈길에 쫓기다 코너에 몰려 지친 채 허우적대는 산돼지는 설피를 신고 끈질기게 추적하는 사람들로부터 결국엔 함정으로 내몰리게 된다. 이때의 설피야 말로 말하나마나 마누라보다 중요하다.

두터운 눈 위에 산돼지 흔적이 고스란히 도장처럼 남아있어서 발자국을 분석해 보면 언제 지나갔는지, 크기와 체중은 어느 정도이고 몇 마리인지, 언제쯤이면 따라 잡을 수 있을 것인지를 노련한 추적자라면 쉽게 분석할 수 있다.

언덕이고 돌밭이고 가릴 것 없이 말 그대로 저돌적으로 치달리는 산돼지는 우리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전광석화 같이 빠르다. 따라서 산돼지를 발견하면 놈이 달아나는 방향을 눈이 많이 쌓여있는 계곡 쪽으로 몰아붙여야 한다. 눈이 없는 말짱한 곳에서 느려터진 인간의 두 다리로 원주인 네발 산돼지를 따라잡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리한 녀석의 뒤를 무망하게 쫓기보단 멀리서 우회로 에워싸 미리 정해둔 골짜기 눈의 함정으로 몰이함은 지당하다.

사람에겐 기감이란 게 있어서 산돼지도 사람의 강한 기감에 질리는지 새끼가 곁에 있거나 더 이상 도피가 불가능할 정도로 부상을 입거나 지치지 않은 상태에선 결코 먼저 공격을 가해오진 않는다. 잔뜩 두려움을 느끼고 그저 멀리 달아나려 기를 쓸 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집돼지완 극단의 차이가 있는 만큼 설익은 공격에 부상을 당한 산돼지는 용맹한 맹수나 다름이 없다. 어지간한 표범이라도 커다란 산돼지를 혼자서 쉽게 포획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체중이 실린 산돼지의 힘과 빠르기는 역시 야생의 맹수라고 해도 절대로 과언이 아니다. 하물며 고초 끝에 부상을 입거나 화딱지가 도를 넘은 산돼지에게 거꾸로 사냥꾼이 되치기 당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때문에 독이 잔뜩 오른 산돼지에게 역습당할 땐 사람이 눈밭 깊은 함정으로 도리어 뛰어들어야만 살 수 있다. 돼지나 사람에게나 함정은 똑같은 함정이겠지만, 사람에겐 바로 필생의 도구인 설피가 있어 도피할 여지가 얻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있으나 마나인 마누라보다 설피 쪽이 더 긴요하단 뜻이다.

사람의 힘을 한곳으로 모으기 위해 커다란 일갈 기합소리와 함께 목덜미 정동맥 급소를 시퍼렇게 날이 선 예리한 창끝으로 정확히 찔러서 산돼지가 미처 고통을 느낄 사이도 없이 단번에 숨통을 끊는 게 가장 일반적이고 능숙한 방법이다. 사냥 도중에 사람이 입을 위험성과 짐승에게 가하는 고통도 생각해서 뇌로 향하는 대동맥을 차단하고 호흡기관도 동시에 차단해 산돼지의 고통을 가장 적게 줄여주며 단시간에 생명을 끊어주는 신중하게 고려된 방법인 것이다. 허나 산돼지의 강인한 목살과 튼튼한 뼈 덕분에 사람이 내지르는 힘만으론 중추신경계까지 단번에 차단하긴 무리일성 싶다. 앞다리 바로 뒤쪽 몸통 중간에 진짜 제 1의 급소 심장이 있긴 하지만, 늑골로 막혀있는데다 범위가 워낙 좁다보니 함부로 길길이 날뛰는 상태에선 도무지 위험할 뿐 제대로 지르기가 쉽지 않음이다.

어지간한 담력과 두둑한 배짱이 아니면 잔뜩 흥분해 벌겋게 충혈 된 두 눈과 입에 흰 거품을 가득 문 채 거친 숨결마저 ‘씩-씩’ 내뿜는 거대한 산돼지와 정면으로 마주해 사람도 지친 상태에서 급소에 정확히 창을 내지르기란 생각처럼 말처럼 쉬운 일일 수 없다. 그래서 가장 먼저 산돼지의 목에 창을 내지르는 사람을 제 1창이라 하며 용기와 공을 가장 높게 쳐주는 건 당연하다.

값비싼 웅담 대용으로 제법 귀하게 여기는 산돼지 쓸개를 비롯해 노획물의 절반가량을 제 1창이 차지하고, 나머지를 함께 사냥에 참여한 일행들이 분배하는 원칙 또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사냥의 절반은 대자연의 폭설이 알아서 해주고 사람들은 나머지 절반의 역할만을 담당한다는 표현이 차라리 옳겠다.

잔인하다거나 위험하다는 한가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들에겐 산간오지에서의 필연적 생존수단이었고, 힘든 겨우살이를 살아남기 위한 정당한 권리행사의 하나였던 것이니, 원시시대부터 근래까지 깊은 산골짝 겨울나기의 지당한 일환으로 내동 그래왔음이다.

 

각박한 현실은 사람을 내쫓고 사람은 산돼지를 뒤쫓으며 힘겨운 겨울나기를 하는 동안 산마을의 대소사는 시방도 내리는 눈처럼 한 줄씩 쌓이거나 더러는 덮여갔으리라.

그렇듯 짙고 농밀한 시간의 야사되어 산골짝에 남겨진 전설보다, 눈밭을 치달리며 돼지 쫓아 솔숲 능선을 넘어간, 혹독한 겨울날을 살아남기 위해 가쁜 숨소리 끝에 혼신을 다한 외침, 흰 눈 덮인 산천을 쩌렁토록 울리던 그들의 ‘앗!’ 고함소리 일갈이 더 그립고 아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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