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지난 그루터기)
하늘이라도 푸르고 높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지
베어진 들깨나무가 몸을 마저 털고 사라진 자리
흰 눈 모여 사는 겨울 묵정밭에 남겨진 뾰족한 그루터기들
눈에도 발에도 그저 거치적거리기만 한 줄 알았더니, 무 생명
때 지난 빈 그루터기인들 소명을 조차 끝마친 건 아니었다.
얽기 설기 굵고 잔뿌리 그물망으로 흙도 보드랍게 움켜쥐고
습기도 보듬어 내년에 싹터올 생명을 기다리다가
가장 먼저 찾아온 노랑꽃 꽃다지를 반듯하게 키워냄이다.
눈물겹도록 가슴 저리도록 위대한 자비심으로 말이다.
다만 꽃을 기다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난 혹독한 겨울을
그처럼 무던히도 참고 견디며 살아낸 줄만 알았었다.
하지만 네가 옳다!
원한다면 부복의 깊고 아늑한 항상성의 품을 만들어
새봄을 구가하는 뭇 생명들을 한 번 더 네 속으로 키워낸다니
너처럼, 나도 너처럼, 낮게 더 낮게 엎드려야 하려니,
이제야 눈에 보이는 베어진 들깨나무 철지난 그루터기
저 속 깊은 은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