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이, 내 동무야!)
제법 여러 날 만에 다시 와주었습니다. 말도 못하고 속으로 애만 끓이고만 있었습니다. 계속 비워있던 척박한 돌투성이 북향 밭고랑에 봄에 음나무(개두릅)를 심더니만 임자가 올핸 농약 제초제를 유난히 자주도 뿌려댑디다.
바깥은 태풍 ‘메기’의 빠른 접근으로 억수비가 내릴지언정 비교적 안전한 누옥 현관 처마 밑에서 동무 ‘늦반딧불이’를 다시 대하는 순간 뻐개지려는 듯 가슴이 절절해서 혼났습니다. 맹독 농양성분이 흐르는 시간에 내리는 비에 정도껏 눅어짐을 기다려 반드시 다시 찾아와 절명의 위험도 무릅쓰고 나와의 조우 약속과 1년의 매듭을 한사코 맺어주려는 것입니다.
이십 수년 만에 내게서 잃었던 눈물을 되찾아 준 동무, 혹독하기 짝이 없으리 제 터전을 매해 휩쓸림 당하면서도 나와 조우의 약속을 한해도 어기지 않는 동무. 어려운 난관을 참고 견디며 나를 꼭 만나러 온 그토록 절절한 학이의 벗, 이들과 만남으로서 1년간의 정리가 맺어지지 않는 이상 학이에게 여름은 온전한 여름이 아닌 겁니다.
땅속 애벌레 땐 만지거나 접근하기는커녕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칠고 흉측한 괴물 같은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먹이도 반드시 동물성 먹거리인 다슬기 또는 달팽이를 섭취해야만 합니다. 하매 다슬기가 살 정도로 오염을 면한 맑은 냇물이 보장되지 않으면
그렇고 말구요, 막역한 내 동무 반딧불이와의 조우, 한해의 역사를 들라 하면 가장 큰 역사랄 수 있습니다만, 한숨 한 모금 마른침 한차례에 차차로 담담해져 갔습니다. 정감도 아껴두고 인연도 미뤄 둔 말이 필요치 않는 의지의 동무는 그래야 옳습니다. 속으론 주체 못할 정감일지언정 호들갑보단 겉으론 담담함이 정답이었습니다. 학이의 한해 중 절반을 이뤄낸 동무는 바로 ‘늦반딧불이’였습니다.
다음 사진은 늦반딧불이보다 약간 작은 덩치의 ‘애반딧불이’입니다. 기실 6월도 초순에 가장 먼저 빛을 내며 서둘러 찾아오는 친구는 바로 요 친구 애반딧불이입니다. 공중 훌치기로 잡아 잠시 방안으로 빌려와 모델을 삼았습니다.
가볍고 사소한 한갓 재미보다 진실이 무엇보다 우선하기에 어쩔 수 없이 애벌레의 흉칙한 모습을 공개합니다. 꼭 덧붙이고 싶은 말은 단지 겉보기 하나에 선과 악이란 모든 내력을 판단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거니와 애벌레도 형광을 잘만 낸답니다.
(그래도 이건 보시기에 좀 나은 모습임도 모쪼록 감안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