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그러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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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자넨 그렇게 살아선 안 돼!”
사람이란 같은 사람 속에서 함께 어울리고 부대끼고 숨 쉬며 짝도 이루며 사는 게 정상일 뿐이란 이론도 아닌 지론을 내세워 내 오지 단독생활을 말리는 다분히 우정 어린 말임을 모르지 않았다.
우직할 정도로 내 옹골찬 곧은 행보와 선배의 자연스런 갈지자 살아가기가 같을 순 없단 속뜻이었지만, 일단은 그 말이 듣기 싫어 일부러 조금쯤 사이를 벌리려했던 아랫동네 선배 한 분, 불과 며칠 사이에 급발한 백혈병을 강릉 큰 병원에서도 어쩔 수가 없었단다. 겉보기론 나보다 더 건강하던 선배였는데…….
선배가 사는데 다소간 빡빡함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조차 평범한 시속의 밉지 않은 일면으로 얼마든지 치부할 수 있었다. 경쟁과 투쟁과 공격적 승리만이 삶의 능사란 잘못된 우리 군대식 교육에 깊이 세뇌된 자신은 약은 척 세상의 원리를 다 알고 있는 척 해도 말이다. 최소한 내겐 호의를 보이려 애씀 또한 사실이었으니까…….
영락없는 개구리는 청개구리, 선배는 내 말을 끝끝내 듣지 않았다. 알고지내는 4-5년 동안 벌써 십여 차례다.
“멍청하기는, 사행천을 이루는 개울 한복판에 집터를 정하는 경우가 어디 있어?”
그랬었다. 각박한 현실 세상과 가급적 괴리되고픈 심정의 증좌인 걸 모르진 않았지만, 첫 번째 지적처럼 남대천 개울 한복판에 집 자리를 잡은 것은 내 풍수지리학 상식엔 전혀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고, 이는 머지않아 어김없는 진실로 판명이 났다. 그것도 있을 수 없는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말이다.
근자에 들어 가장 절실한 충언은 선배가 그간 풀지 못해서 항상 궁금해 하던 질문에 답하기 위한 방편으로 있었다.
“저 소나문 왜 솔방울을 저리도 많이 달릴까?”
선배의 질문은 그랬었다. 입지조건이야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었고 질병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뜨락 입구에 해묵은 소나무 하나는 자신의 수명이 다함을 미리 알았던 것이고, 내재의 생존본능에 따라 솔잎 보다 더 많은 솔방울 열매로 후손 늘리기에 에너지의 총력을 일로 집중할 뿐, 성장은 이미 멈춰버렸던 것이다. 이 같은 설명 끝에…….
“좋은 일 아니야, 조짐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이번 시즌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
보다 더 직설적이어야 옳았을까? 경솔할 뿐 너무 아는 척한단 타박을 각오하고 생욕을 먹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믿지 않고 무시해서 그렇지 사태의 정답은 이미 초기에 개울 한복판 입지불가란 상식적인 선언으로 벌써 나와 있었지 않은가.
장거리 여행이 버거운 내 컨디션을 미처 돌아볼 여유도 없을 것 같다. 서울 큰 병원 응급실에 입원한 후 1주일, 유독 날 찾고 기다린단 속초 아우의 전화 타진에 내일 함께 가마고 기왕에 약속을 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선배는 선배, 나는 나, 이번 문병 길에서 돌아오면 심각하게 생각해야할 것 하나가 있다. 진작 날짜로 예비 된 죽음은 없을지라도 미연에 준비된 죽음에 대한 생각이 그것이다.
매 가을 초입마다 준비해 둔 유서가 석 장, 맘만이 아닌 실제에서 이젠 준비를 해둬야 할 것 같다. 그때까지 조금만 더 깨우치고 한번만 더 사랑하다 갈 수 있겠다면 좋겠는데…….
서울 여의도 병원에서 급성 골수성 혈액암 즉 백혈병과의 투병은 벌써 시작됐고 고통과 통증의 잔혹함은 조금씩 그의 마각을 어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주변의 평판은 의식치 않으면서도 아랫사람을 향한 배려가 습관처럼 자리 잡고 있었던 걸 알고는 있었으나, 억지로 자신 있어 보이려 하는 몸짓 눈짓이 더 안타까웠다.
의례 그렇듯 응급실의 초를 다투는 절박한 분위기 속에서 어제보단 많이 나아진 것 같단 형수의 피곤하고 어설픈 미소가 자꾸 오버랩 되는 걸 보니 내 믿음의 방향 또한 옹골차게도 한곳인 모양이었다.
‘그래 죽어도 살아라, 선배여!’
일단의 위기는 넘겼으니 입원실이 나오는 대로 옮길 것이란 당연한 소식을 무슨 새 소식인 듯 밝게 일컫는 형수는 나보다 배는 더 옹골참이 분명했다.
‘그래 용하다 용해, 형수여!’
모처럼 올라간 본향 서울행이었지만 무슨 정성으로 번잡함을 사서 만들 텐가, 알리면 붙들리랴 어느 곳인들 연락도 하지 않고 당일로 어울려 어서 내려오고 말았다. 서울에의 매력을 완전히 잃은 주제에 더해진 하필 암울한 병원 분위기는 내 머물러있는 골짜기를 그렇듯 더욱 절실한 곳으로 강조했음이다.
‘그래! 어서 빨리 돌아가야지!’
남대천, 여름철 휴가 시즌을 위해 당장 내일 일은 알지도 못한 채 이것저것 장사거릴 잔뜩 준비해 뒀으니, 노천에 숲 속 진열장을 무작정 내버려둘 수도 없는 난처한 일, 자체로서 처치 곤란한 부담 덩어리였다. 이래서 한 치 코앞도 내다볼 줄 모르는 딱한 인간이란 표현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병원에서 처음 만난 의리 있는 인사들 서넛이 주인인 선배도 없이 아우 하나가 우선 지키고 있는 그런 아랫마을 빈집에 들렀단다. 앞을 알 수가 없기에 잘못 채워져 있는 여름 진열장을 다만 얼마쯤이라도 기왕이면 비워주고자 일부러 들렀을 것이다.
분명한 비극적인 사태에 당해 오랜 교분이 아닌데도 자신의 일처럼 관심을 보이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 반듯한 인사들, 대부분 나보다 몇 살쯤 아래이긴 해도 무작정 아랫사람이라 하대할 수 없을 만큼 정정당당함이 얼마나 그득한지 모른다.
일부는 문병 차 방문한 서울의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선배와 처음 인사를 나눈 처지들이라지만 그냥 말아선 안 되는 일이었다. 내 스스론 대자연계와 인간계의 경계선을 살아내는 주변인이라 말하지만, 그들에게 나는 모른 척 해선 안 되는 엄연한 현지주민인 것이다.
어젠 쥔의 험악한 고난을 미처 모르고 휴식 차 찾아온 우연한 손님들을 위한 얼굴 접대로 어쩔 수 없이 불려나갔다지만, 오늘이야말로 이 바탕에 토종 강원도 옥수수 한 부대쯤 정성으로 삶아가야겠다. 자발적으로 기껍게 말이다. (계속)
*자연수상록 '한 스푼'(어문학사)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