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짓기 강요 수컷 피해 죽은 척하는 왕잠자리

조홍섭 2017. 05. 02
조회수 12735 추천수 0
수컷 추격하면 땅바닥에 추락 몸 뒤집고 꼼짝 안 해
별막이왕잠자리 암컷서 관찰…동물계 5종에서 발견

Aeshna_juncea_hovering수컷.jpg » 고산지대 습지에 서식하는 크고 아름다운 잠자리인 별박이왕잠자리. 독특한 산란행동이 발견됐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별박이왕잠자리는 고산지대 습지에서 볼 수 있는 크고 아름다운 잠자리이다. 배의 무늬가 검은 바탕에 파랗고 노란 점이 흩어져 있는 모습이 밤하늘의 별 같아 이런 이름을 얻었다. 우리나라부터 유라시아 대륙과 북아메리카까지 널리 분포하는 이 잠자리가 짝짓기 때 특별한 행동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스위스 취리히대 생물학자 라심 켈리파는 2015년 7월 알프스산맥의 고산지대에서 잠자리 조사를 하다가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동료에게 쫓기던 잠자리 한 마리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했다. 다가서 보니 별박이왕잠자리 암컷이 뒤집혀 꼼짝 않고 있어 죽은 모습이었다.

수컷은 암컷 위를 잠시 선회하다가 사라졌다. 암컷이 정말 죽었나 해서 접근했더니 푸드덕 날아가 버렸다. 켈리파는 이후 별박이왕잠자리 암컷이 마음에 들지 않는 수컷을 뿌리치기 위해 죽은 척하는 행동을 관찰해 과학저널 <생태학> 최근호에 보고했다.

ae1.jpg » 별막이왕잠자리의 짝짓기 모습. 켈리파

연구자는 연못 두 곳을 정해 관찰했는데, 수컷은 주로 연못 주변을 배회하며 암컷과 짝짓기를 시도했다. 별박이왕잠자리는 산란할 때까지 교미 상태를 유지하는 다른 많은 잠자리와 달리 수컷이 떨어져 나간 뒤 암컷 홀로 물가에 알을 낳는다. 

암컷 홀로 알을 낳을 곳을 찾아다니는 동안은 다른 수컷이 짝짓기를 강요할 수 있는 매우 취약한 시간이다. 암컷으로서는 한 번의 짝짓기가 모든 알을 수정하기에 충분하고, 또 추가 교미는 산란관을 손상할 수 있어 덤벼드는 수컷이 달갑지 않다.

ae2.jpg » 별박이왕잠자리는 다른 잠자리와 달리 교미를 마친 수컷이 떨어져 나간 뒤 암컷 홀로 산란지를 찾는다. 이때가 다른 수컷이 덤벼들 취약한 시기이다. 켈리파.

수컷의 추격을 받은 암컷 35마리 가운데 31마리가 땅바닥에 추락했고 비행을 계속한 암컷은 4마리에 지나지 않았다. 땅에 떨어진 31마리 가운데 27마리가 죽은 척했는데, 21마리가 수컷의 괴롭힘을 피할 수 있었다. 이처럼 높은 회피 성공률을 보인 까닭은 수컷이 움직이지 않는 물체를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연구자는 밝혔다.

땅에 떨어진 암컷은 정신을 잃은 것일까. 연구자는 이들을 손으로 붙잡으려 시도했는데 31마리 중 27마리는 잽싸게 도망쳤다. 

800px-Aeshna_juncea_LC0175.jpg » 덤불에서 쉬고 있는 별박이왕잠자리 수컷. 검은 바탕에 파랗고 노란 점이 별처럼 빛난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켈리파는 “이런 행동이 진화한 것은 포식자 회피를 위해 죽은 척하는 행동을 짝짓기에도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며 “죽은 척하는 암컷이 강압적인 교미를 더 잘 피하고 생존과 번식률이 높아 이런 행동이 선택받았다”고 풀이했다.

동물 가운데 이처럼 죽은 척해 짝짓기를 회피하는 행동이 보고된 것은 거미 1종, 파리매 2종, 사마귀 1종에 이어 5번째라고 연구자는 밝혔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Rassi Khelifa, Faking death to avoid male coercion: extreme sexual conflict resolution in a dragonfly, Ecology, DOI: 10.1002/ecy.1781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 메일
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메일 : ecothink@hani.co.kr       트위터 : eco_think      

최신글




최근기사 목록

  • 한반도 고유종 다람쥐 프랑스 천덕꾸러기 된 까닭한반도 고유종 다람쥐 프랑스 천덕꾸러기 된 까닭

    조홍섭 | 2017. 11. 24

    빙하기 고립 독립 종으로 진화, 남한 내에도 3개 집단 분화1980년대까지 수백만 마리 수출, 라임병 숙주로 골치꺼리다람쥐가 바쁜 철이다. 숲 바닥에 떨어진 밤톨이나 도토리, 씨앗 등을 볼주머니에 가득 채운 뒤 땅속 깊숙이 파 만든 저장 창고...

  • 여행비둘기 50억마리는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여행비둘기 50억마리는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조홍섭 | 2017. 11. 17

    수수께끼 같은 100년전 멸종사1860년대 이후 30년만에 몰락수렵꾼 사냥만으론 설명 안돼“번식에 필요한 규모 무너진 탓”‘개체수 많아도 멸종 가능’ 새 가설1914년 미국 신시내티 동물원에서 ‘마사’란 이름의 29살 난 여행비둘기가 죽었다. 북아메...

  • 개·고양이는 사람보다 하루 먼저 지진 느낀다개·고양이는 사람보다 하루 먼저 지진 느낀다

    조홍섭 | 2017. 11. 16

    하루 전 안절부절못하고 주인에 들러붙어지진 1∼3주 전부터 젖소 짜는 우유량 줄어개나 고양이가 안절부절못하거나 젖소에서 짜는 젖의 양이 갑자기 줄어드는 현상이 곧 닥칠 지진의 전조로 주목받고 있다. 지진을 앞둔 동물의 다양한 이상행동 가...

  • 소행성 다른 데 떨어졌다면 공룡은 멸종하지 않았다소행성 다른 데 떨어졌다면 공룡은 멸종하지 않았다

    조홍섭 | 2017. 11. 13

    충돌지점 화석연료와 유기물이 치명타, 13% 확률에 해당대양이나 대륙 중앙 떨어졌다면 육상공룡은 아직 어슬렁공룡이 멸종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지구 생태계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사람을 포함한 포유류는 육상동물의 주역이 아닌 공룡이...

  • 브라이드고래의 ‘천하태평’ 사냥법브라이드고래의 ‘천하태평’ 사냥법

    조홍섭 | 2017. 11. 08

    표면에 입 벌리고 기다린 뒤 ‘꿀꺽’수질오염 적응, 문화적 전파 가능성밍크고래, 브라이드고래, 대왕고래, 긴수염고래 등 수염고래의 사냥법은 비슷하다. 바다 표면을 돌아다니며 크릴이나 작은 물고기가 몰린 곳을 찾은 뒤 거대한 입을 크게 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