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혈동물’ 산거머리, 야생동물 조사 일꾼이 되다

조홍섭 2018. 03. 12
조회수 9349 추천수 1
생쥐부터 들소, 박쥐, 멧닭까지 길목 잠복하다 공격
혈액 유전자 분석하면 그 지역 동물 다양성 조사 ‘끝’

l1.jpg » 남아시아 열대우림에서 효과적으로 포유류 생물 조사를 할 수 있는 것으로 밝혀진 해마딥사 속 산거머리. 미국자연사박물관 마크 시달 제공.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열대우림의 포유동물을 조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덥고 습하며 거머리가 덤벼드는 나쁜 여건에다 동물이 야행성이거나 은밀하게 행동하고 워낙 희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야생 포유류를 조사할 때 주로 쓰는 방법은 배설물이나 털, 발자국 등을 찾는 것이고, 최근에는 동물이 지나갈 때 작동하는 무인 카메라가 널리 쓰인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유력한 조사 수단이 나타났다. 바로 연구자들을 애먹이던 산거머리가 그 주인공이다.

산거머리는 길이 2∼3㎝이며 다른 거머리와 달리 물속이 아니라 숲에 난 동물의 이동통로에 잠복하다가 지나가는 동물에 들러붙어 피를 빤다. 이 피를 확보해 유전자를 분석하면 거머리의 공격을 당한 동물이 어떤 종인지 알 수 있다. 마이클 테슬러 미국 자연사박물관 학예사 등은 과학저널 ‘계통분류학과 생물다양성’ 최근호에 실린 논문에서 산거머리가 포유류 생물 다양성을 조사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방글라데시, 캄보디아, 중국 남부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밝혔다.

l2.jpg » 산거머리는 동물 이동통로에 잠복하다 체온과 공기 흐름, 진동 등으로 동물을 감지하고 들러붙어 흡혈한다. 미국자연사박물관 릴리 베르니커 제공.

연구자의 하나인 마크 시달 미국 자연사박물관 학예사는 “이번 조사에서 우리는 보호구역 안에서 총을 쏘지도, 덫을 놓지도, 배설물이나 털을 채집하지도, 특히 무인 카메라도 설치하지 않고도 어떤 포유류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며 “이런 방법은 이런저런 문제를 안고 있다”고 박물관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예컨대, 연구자들은 무인 카메라가 쥐 같은 소형 포유류는 감지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이에 비해 거머리는 “정확도, 완성도, 속도, 비용 등 모든 면에서 다른 조사 방법보다 우월했다”고 시달은 말했다. 거머리는 흡혈 몇달 뒤에도 유전자 분석을 할 수 있는 혈액을 간직하고 있으며 소형 포유류도 빠뜨리지 않는다.

이번 연구에서 산거머리는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그 지역 동물의 피를 두루 빤 것으로 나타났다. 흡혈 대상으로는 야생 소인 가우어와 문착 등 발굽을 갖는 우제류, 야생 고양이 등 육식동물, 토끼류, 쥐류, 나무두더지류, 마카크원숭이 등을 포괄했고, 메추라기, 멧닭, 꿩 등 땅에 사는 새와 박쥐도 들어있었다. 남아시아에 매우 드문 천산갑과 코끼리를 빼고 포유류의 대부분이 산거머리의 공격대상으로 나타났다.

l3.jpg » 산거머리를 이용한 조사는 빠르고 간편하지만 무엇보다 조사 대상인 거머리가 스스로 사람을 찾아온다는 장점이 있다. 미국자연사박물관 릴리 베르니커 제공.

테슬러는 “거머리를 이용하는 방법은 보전을 위해 매우 유용한 수단임이 드러났다. 이 방법은 아주 빠르고 쉽다. 심지어 분석 대상인 거머리조차 찾아다닐 필요가 없이 제 발로 찾아온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저 하이킹을 가듯이 조사지역에 가기만 하면 되고 단지 당신 피를 빨기 전에 떼어내는 것만 신경 쓰면 된다”며 “어떤 지역의 척추동물상을 알아보는데 기존의 방법으로는 여러 달이 걸렸지만 이 방법으로는 하루 동안의 샘플링이면 된다”고 보도자료에서 덧붙였다.

산거머리는 주로 열대지방과 대만, 일본 등에 서식하지만 우리나라에도 서남쪽 끄트머리인 전남 신안군 가거도에서 확인된 바 있다(▶관련 기사: 열대 정글 흡혈 산거머리, 남해 가거도에도 산다). 가거도 산거머리는 주로 장마철에 출현해 9월 중순까지 활동하다 휴면에 들어간다. 채준석 서울대 수의대 교수팀이 국립생물자원관의 의뢰로 한 조사에서 산거머리가 사람, 생쥐, 족제비, 흰배지빠귀, 울새 등 다양한 동물의 피를 빤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leech3.jpg » 신안 가거도에서 발견된 산거머리가 등산객의 다리에서 흡혈해 통통해졌다. 이 거머리 혈액에서도 다양한 야생동물의 유전자가 확인됐다. 국립생물자원관 제공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Michael Tessler, Sarah R. Weiskopf, Lily Berniker, Rebecca Hersch, Kyle P. Mccarthy, Douglas W. Yu & Mark E. Siddall (2018): Bloodlines: mammals, leeches, and conservation in southern Asia, Systematics and Biodiversity, DOI: 10.1080/14772000.2018.1433729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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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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