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식기 끝난 수사슴, 큰 뿔 왜 달고 다니나

조홍섭 2018. 09. 06
조회수 5514 추천수 1
늑대는 뿔 탈락 수컷 집중 사냥, 죽지 않으려면 힘들어도 유지 
일찍 뿔 뗄수록 다음 번식기 유리…늑대냐 번식이냐 딜레마

e1.jpg » 북아메리카 엘크 수컷이 커다란 뿔을 과시하고 있다. 큰 뿔은 번식뿐 아니라 포식자인 늑대를 막는 무기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발정기를 맞은 수사슴은 거대한 뿔을 앞세워 암컷을 차지하려는 싸움을 벌인다. 뿔의 크기는 수사슴의 싸움 능력을 보여주는 정직한 잣대다. 그러나 번식기가 끝난 뒤 거대한 뿔은 무겁고 귀찮은 군더더기일 뿐이다. 수사슴의 뿔은 이듬해 3월이 되어서야 떨어져 나가고 그 자리에서 작은 새로운 뿔이 자란다. 왜 사슴은 겨우내 무거운 뿔을 이고 다닐까.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에는 복원한 늑대 무리가 8종의 발굽 동물을 사냥한다. 늑대가 가장 선호하는 사냥감은 아시아의 말사슴과 비슷한 북아메리카 엘크이다. 미국 연구자들이 2004∼2016년 동안 늑대가 엘크를 사냥한 기록을 분석했더니 흥미로운 사실이 나타났다. 뿔이 탈락한 수컷 성체가 포함된 엘크 무리는 그렇지 않은 무리보다 늑대에 공격당할 확률이 3.6배나 높았다. 다시 말해 늑대는 뿔을 버린 엘크를 표적으로 삼는다. 수사슴 뿔은 늑대의 공격을 막는 무기인 셈이다.

e2.jpg »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 늑대 무리가 외톨이 엘크 수컷을 공격하고 있다. 엘크는 늑대의 단골 표적이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그렇다면 왜 엘크 수컷은 이처럼 소중한 뿔을 탈락시키는 걸까. 여기엔 단지 무겁고 번거로운 것을 폐기하는 것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다. 뿔을 일찍 탈락시킨 엘크일수록 새 뿔이 먼저 돋아나고 번식기인 가을에 더 큰 뿔로 자란다. 뿔 교체를 서두를수록 번식기의 승자가 될 확률이 커지는 셈이다.

결국 엘크 수컷은 딜레마에 빠진다. 내년 번식기를 위해 뿔을 일찍 버릴 것인가, 아니면 늑대에게 붙잡혀 죽지 않기 위해 뿔을 늦게까지 달고 다닐 것인가. 사슴이 결단을 내리는 건 아니다. 늑대의 포식압이 얼마나 센가에 따라 자연이 그 시기를 결정할 뿐이다.

e3.jpg » 수컷 엘크와 늑대의 관계로 나타낸 일 년. 메츠 외 (2018) ‘네이처 생태 및 진화’ 제공.

연구자들은 “큰 뿔로 인한 혜택이 가장 큰 나이 많고 영양 상태가 좋은 수컷이 가장 일찍 뿔을 버리고 늑대 위험을 감수한다”라고 밝혔다. 짝짓기 가능성이 거의 없는 어린 수컷은 당연히 뿔 탈락 시기가 가장 늦다. 뿔을 일찍 포기한 가장 힘센 수컷이 늑대의 먹이가 된다. 연구자들은 “이런 현상은 무리 가운데 영양 상태가 가장 나쁜 개체부터 포식자의 먹이가 된다는 통념과 어긋난다”며 “과장된 성 선택 무기가 포식자를 물리치는 2차 기능을 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라고 밝혔다. 

늑대는 엘크를 겨우내 집중적으로 사냥한다. 엘크가 번식기부터 5달 이상 거추장스러운 뿔을 달고 다니는 이유는 바로 늑대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러나 3월이 되면 번식을 위한 결단을 내리게 되고 2∼3달에 걸쳐 뿔을 교체한다.

GettyImages-537867731.jpg » 늑대가 죽인 엘크 사체를 코요테와 까치가 먹고 있다. 겨울철 엘크는 늑대의 집중적인 사냥 대상이다. 게티이미지 뱅크 제공
.
뿔이 엘크의 방어 무기라는 사실은 다른 사슴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고 연구자들은 밝혔다. 무스는 엘크보다 뿔을 다는 기간이 3달 짧은데, 거대한 몸집 자체가 방어 수단이기 때문이다. 순록은 번식기 직후 뿔을 떼어내고 빠른 속도로 늑대가 없는 지역으로 이동하는 방법을 택한다.

이 연구는 4일 과학저널 ‘네이처 생태 및 진화’에 실렸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Matthew C. Metz et al, Predation shapes the evolutionary traits of cervid weapons, Nature ecology & evolution, https://doi.org/10.1038/s41559-018-0657-5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 메일
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메일 : ecothink@hani.co.kr       트위터 : eco_think      

최신글




최근기사 목록

  • 열파 5일 노출 딱정벌레, 정자 75% 감소열파 5일 노출 딱정벌레, 정자 75% 감소

    조홍섭 | 2018. 11. 16

    기후변화 위협 실험으로 증명…후대까지 영향 나타나도시 대기오염도 곤충 생장 억제, 식물 방어물질 증가기후변화로 폭염 사태가 세계적으로 잦아지면서 생태계 파괴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생물 다양성이 낮아지고 생물량이 줄어드는지는...

  • ‘현상금’ 붙은 귀신고래, 연어 그물에 걸려 사라질라‘현상금’ 붙은 귀신고래, 연어 그물에 걸려 사라질라

    조홍섭 | 2018. 11. 15

    핵심 서식지 사할린 북동부에 대형 정치망 400틀 설치전체 200마리 “위험 매우 커”…19%가 한번 이상 그물 걸려 귀신고래는 이름만큼이나 이야기가 많이 얽혀있는 고래다. 무엇보다 국립수산과학원이 2008년 “사진으로 찍으면 500만원, 그물에...

  • 5m 거대 철갑상어, 양쯔강서 댐 건설로 멸종 위기5m 거대 철갑상어, 양쯔강서 댐 건설로 멸종 위기

    조홍섭 | 2018. 11. 13

    한국 등 동아시아 살던 세계 최대 철갑상어, 성체 156마리 남아유일 번식지 양쯔강 서식지 감소·수온 상승…“10∼20년 안 멸종”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게 자라는 민물고기는 잉어나 메기가 아니라 철갑상어다. 최대 5m까지 자라는 것으로 알려진 이 ...

  • 북극이 도요새의 거대한 ‘덫’이 되고 있다북극이 도요새의 거대한 ‘덫’이 되고 있다

    조홍섭 | 2018. 11. 12

    70년 동안 둥지 포식률 3배 증가…수천㎞ 날아와 위험 자초하는 셈레밍 등 설치류 먹이 급감하자 여우 등 포식자, 새 둥지로 눈 돌려새만금 갯벌에서 볼 수 있던 넓적부리도요는 지구에 생존한 개체가 400마리 정도인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멸종...

  • 개는 정말 말귀를 알아들을까개는 정말 말귀를 알아들을까

    조홍섭 | 2018. 11. 09

    단어 1천개 이상 구분하는 ‘천재’ 개도개 두뇌 연구 결과 단어 처리 뇌 영역 확인‘개는 나의 명령을 곧잘, 그것도 다른 개들보다 훨씬 잘 알아듣는다.’ 개 주인의 4분의 1은 자신의 반려견이 남의 개보다 더 똑똑하다고 믿는다는 조사 ...